(과일)맛의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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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과를 열심히 쓴다는 어느 바에서 생과를 한 쪽 얻어 먹었는데 형언할 수 없는 맛이 났다. 아니 물론, 말로 표현할 수 있다. 넓고 탁하지만 끝이 날카롭지 않고 뭉툭한 단맛이 순간 안개처럼 퍼졌다가 이내 사라져버린다. 한마디로 인공감미료의 맛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거의 아무런 여운이 남지 않는다. 신맛 같은, 과일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다른 맛은 전혀 없다. 잠깐 등장하는 주된 단맛마저 밍밍함의 파도에 곧 휩쓸려 버린다. 공허하다는 표현이 딱 들어 맞는다. 크고 잘생겼지만 그만큼 맛이 있지는 않다. ‘좋고 나쁨’의 맛 이전에 헤아릴 수 있는 맛의 요소 자체가 별로 없다는 말이다.

아이슬란드 대통령이 하와이안 피자, 정확하게는 피자에 얹는 파인애플에 대한 증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여파가 한국의 트위터 세계에도 미쳤다. 꽤 많은 이들이 익힌 과일에 대한 증오를 앞다투어 표현했다. 그 가운데 일부는 확실한 취향의 영역이다. 과일도 익혀 먹을 수 있음을 알지만 질감과 온도와 맛 가운데 하나 또는 그 조합이 싫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편 굉장히 높은 확률로 과일 또한 익혀 먹는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흔하게 살 수 있는 프리저브, 즉 잼류도 전부 익힌 과일이다. 한편 건포도 등 말린 과일 또한 ‘뜨겁지 않은 불’을 써서 익힌 과일이다. 조리가 별 게 아니고 재료의 상태를 물리 또는 화학적으로 변화시키는 행위다. 포도를 말리면 수분이 줄어들면서 단맛이 강해진다. 또한 모든 과일이 생식을 목표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와인을 만드는 포도 품종은 기본적으로 생식용이 아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생식용 수준으로 기본 당도가 높다면 발효 자체가 감당이 안되거나, 도수가 더 높아질 수 있다.

진짜 문제는, 현재 한국의 과일이 생식 외의 용도로는 쓸 수 없을 수준으로 맛이 붕괴 되었다는 사실이다. 어떤 쪽이 더 문제인지조차 모르겠다. 익혀 먹을 수 없다면 생과일이나마 맛있게 먹을 수 있어야 되는데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역시 사과가 대표적인 과일인데, 가을에 잠깐 나오는 홍옥이 아니라면 굳이 익힐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기본적으로 품고 있는 단맛이 가열하면 한층 더 괴상해지는 데다가 질감도 유쾌하지 않다.

그래서일까, 익히지 않은 과일을 얹는 페이스트리, 즉 타르트나 페이스트리 류가 갈수록 늘고 있다. 딸기는 기본이고 청포도 같은 것들도 얹는다. 익히지 않은 과일은 일단 질감이 크림이나 페이스트리와 너무 달라 한데 어우러지지 않는다. 먹다 보면 과일 따로, 나머지 재료 따로 논다. 맛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 딸기도 사과 만큼이나 망가졌으므로 페이스트리의 나머지 인공적인 요소가 품는 집약적인 맛에 동조하지 못하고 겉돈다. 그러나 이런 형식이 일단 보기 좋아 보일 뿐더러 만들기도 편하므로 지배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사과와 딸기가 그렇고, 배도 예외가 아니며 이제 제철이 언제인지도 모르는 참외도 마찬가지다. 맛의 균형이 전부 붕괴되었다. 귤은 어떤가. 난 차라리 신맛이라도 강하게 낫으면 좋겠다. 겨울에 입을 씻기 위한 후식으로 신맛 강한 귤만큼 좋은 게 있던가. 그런 귤을 이제 거의 찾기가 어렵다. 맨 앞에서 언급한 사과와 마찬가지로 인공감미료의 맛이 뭉게뭉게 퍼졌다가 사라지는데 불쾌한 수준이다. 이런 과일 맛의 붕괴는 한편 미각의 붕괴일테고 대상은 다수일 텐데 그럼 결국  ‘국민의 미각이 붕괴되었다’는 참으로 거창한 발언까지 굳이 해야 되는 건가?

4 Responses

  1. Moon says:

    과일 산업 시장(특히 우리나라)에서 중요한 건 사실 식성이 아니라 효율성이겠죠. 사실 우리가 먹는 과일은 이제 맥도날드의 햄버거나 다를바 없습니다.

  2. cookeng says:

    가끔은 묵은 사과에 불을 대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사고나면 바로 생식으로 해치워버리는건 사실이네요. ‘그래야만 맛있으니깐’ 그렇게 하는것이겠지요. 생과일이 올라간 타르트류는 거의 손이 안가더군요. 말씀하신 이유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와인 만드는 포도 품종을 예로 들으신 부분은 조금 이상합니다. 가당없이 23~24브릭스 정도에서 도수가 14~15 내외로 최종 발효 되는데, 제가 알기로는 우리나라 생식용 포도 품종 중에 20브릭스 넘는 것은 극히 드물어요. 가당 없이는 와인 제조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죠.

  3. 토마토… 토마토도 생각이 나네요.
    우리나라에서 재배하는 품종 자체가 그런 것도 있지만, 조리를 위해 쓰기에는 턱없이 싱거워서요.
    국내에도 플럼토마토 파는 곳이 있다고 들었는데 충분히 진한 맛이 날지 궁금합니다.

  1. 02/27/2017

    […] 흥미로운 의견이 들어와서 생각했다. 한국의 붕괴된 과일맛을 한탄하는 지난 글에 ‘과일 산업 시장(특히 우리나라)에서 중요한 건 사실 식성이 아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