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잡담
오랜만에 지인을 만나 잘 생긴 버거를 먹고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몇 군데 들러 볼일을 보고 아주 가볍게 장을 봐 가지고 집에 돌아왔는데 드문드문 기억이 끊겨 있다는 걸 깨달았다. 들렀던 장소와 대화, 그리고 혼자서 했던 일의 처음과 끝은 그럭저럭 기억하는데 중간이 대체로 끊겨 있었다. 특히 압구정역에서 3호선을 타고 올라와 을지로 3가에서 2호선을 갈아 타고 돌아왔는데, 이 구간은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을지로 3가 긴 통로의 녹색 O자 및 빨간 X자가, 그리고 두 정거장쯤 남은 지점에서 평소와 달리 빈 자리에 앉는 쪽을 선택했다는 기억만 남아 있다. 그리고 이미 집 앞 도로가 너무 막혀 한 정거장 쯤 앞에서 내렸다는 것까지만.
한 10년 쯤 전인가, 몇몇 일들을 그전과는 달리 더 이상 생생하게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나름 안심했던 기억이 있다. 모든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살면 괴롭다. 자다 말고 특정 기억이 떠올라 소스라치며 놀라 일어난 경험이 있는가. 이제 갈수록 한국에선 드물어지는, 화창하고도 완벽한 봄날 오후 즐거움에 가득 차 길을 걷고 있다가 저 먼 몇 십년 전의 불쾌한 기억이 떠올라 기분이 더러워진 적이 있는가. 기억은 많은 경우 고통이다. 말도 안되는 지하철 시-사실 대부분의 지하철 시는 말이 안되지만-가 논란이 되면서 첫사랑 타령 등등이 도마에 오르고 있다. 대체 첫사랑 같은 걸 몇 살까지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시까지 쓰고 있는 걸까. 과연 그것은 진짜 기억일까 아니면 그저 기억하고 있다고 철썩같이 믿는 어떤 환영 같은 것일까. 후자에 500원 걸겠다.
마감한다고 한참 동안 주말 구분 없이 일해서 월요일 오후부터 약간 ‘폐인 모드’로 쉬었는데 이틀 반만에 불안해졌다. 그것은 아마도 2월 5~12일까지 하루에 하나씩 있는 마감 때문일 것이다. 내일부터 일하지 않으면 그 다음 주에 큰 패닉에 빠질 것 같다. 이제 1월도 채 가지 않았지만 작년 말을 기점으로 재작년이나 작년의 그 이전에 비해서는 일이 조금 잘 들어오는 것도 같은데 그야말로 아무 것도 낙관할 수 없는 적폐의 절정이 곧 현실이므로 낙관은 안 된다. 어차피 프리랜서의 삶엔 낙관 같은 건 없다고 이제 믿는다. 이제 8년차다.
스크린도어 시들은 처음에 한두개 읽어보고 그 쪽으로 눈도 최대한 안 마주치려 해왔었는데 이번에 그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정말 경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