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음식 비평의 인정 투쟁과 과제 (2)
음식 비평의 접근과 방법론
신문 레스토랑 리뷰의 존재는 무엇을 시사하는가. 이를 뜯어보는 것이 한국 음식 비평의 인정 투쟁에 실마리를 제시한다. 바깥으로부터 안으로 들어오며 살펴보자. 첫째, 비평 대상으로서 음식이다. 음식은 어떻게 문학, 음악, 미술 등과 더불어 비평의 대상으로서 지위를 누릴 수 있을까. 달리 말해, 음식도 예술의 범주에 속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영국의 철학자 줄리언 바지니는 “요리 예술의 장점은 다른 동물이 절대 만들어낼 수 없는 창조물로 우리를 기쁘게 하면서도 우리가 뼈와 위장을 가진 영혼-육체적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는 것(『철학이 있는 식탁』, 297쪽, 줄리언 바지니, 이용재 옮김, 이마, 2015)”이라 밝힌다. 음식이 예술에 속할 수 없는 이유로 가장 흔하게 꼽는 물질성(corporeality) 또는 먹어서 사라지므로 떨쳐버릴 수 없는 덧없음(ephemerality)이 오히려 음식의 예술성을 강화한다는 논리다. 이는 비단 엘불리(El Bulli) 등, 리뷰의 주 대상인 고급 레스토랑에만 적용할 수 있는 논리가 아니다. 물론, 그런 종류의 현대요리(modernist cuisine) 레스토랑이 바지니의 요리 예술 논리에 더 잘 들어맞는 것은 사실이다. 서양 요리 기술의 기본을 바탕으로 물리 및 화학적 조작을 가한 질감 변화 등을 통해, 극도의 극장성(theatricality)을 추구하기 때 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영혼-육체적 속성을 만족시켜준다면, 즉 육체를 통한 감각 또는 생리학적 변화를 바탕으로 영혼에 호소하는 음식이라면 가격대와 방법론이 비평의 장애물이 될 이유는 없다.
두 번째는 평가의 대상이다. 무엇을 보는가. 음식 비평의 최전선이 ‘레스토랑 리뷰’라는 형식으로 존재하는 데 주목한다. 당연히 음식이 중심이지만, 총체적인 외식 경험이 비평의 대상이다. 2011년부터 <뉴 욕타임스>의 레스토랑 비평을 맡고 있는 피트 웰스(Pete Wells)는 인터뷰에서 “때로 음식의 수준이 가장 떨어져 접객이나 분위기를 더 논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리뷰의 초점은 바뀔 수 있어도 기준은 그대로다. 특히 음식에 그렇다. 언제나 사려 깊은 조리, 세부사항, 적합한 가격, 그리고 당연히 맛을 본다”고 자신의 평가 철학을 밝힌다(「Pete Wells, Restaurant Critic, Answers Readers’ Questions」, <뉴욕타임스> 2012년 12월 3일자). 이러한 평가 철학이 세 번째, 평가의 방법론 설명에 필요한 멍석을 깔아준다. ‘사려 깊은 조리, 세부 사항, 적합한 가격’은 어떻게 볼 수 있는가. 앞에서도 언급한 공식, ‘총체적 경험으로서 맛(flavor)= 맛(taste)+향(aroma)+질감(texture)’을 음식 평가의 기본 원칙으로 활용한다. 해당 음식이 맛있으려면 ‘사려 깊은 조리’가 필요한데, 이는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가능하다. 첫째, 재료와 조리의 내부 논리 이해다. 재료의 특성을 이해하고, 그에 맞는 최적의 조리법을 고안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둘째, 이러한 이해의 바탕 위에서 ‘세부사항’을 잘 지켜야한다. 재료의 익힌 상태, 간 등이 적절함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음식이라는 치킨을 예로 들어보자. 닭은 ‘빈 캔버스’라고 불릴 정도로 중립적인 맛을 지녔으며, 살이 섬 세하면서도 부위마다 특성이 달라 익히기가 의외로 쉽지 않다. 따라서 ‘옷’을 입혀 보호하는 조리법인 튀김이 최적의 조리법이다. 이것이 ‘사려 깊은 조리’의 방편이다. 한편 이러한 원칙에 입각해 실제로 튀길 때에는 속살은 너무 익어 뻣뻣하지 않은 한편, 겉은 타지 않으면서도 바삭하게 익혀야 한다. 요즘은 여기에 과학이 길잡이 역할을 맡는다. 반도체와 허벌 망원경보다 ‘물은 100°C에서 끓는다’의 과학이다. 의무교육의 장 안에서 배운 수준이면 요리에서 필요한 사물 변화의 이치를 밝히기에 충분하다는 말이다. 튀김이라면 열의 전도, 물의 증발,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마이야르 반응이면 충분하다. 한편 거의 대부분의 음식점에서 지키지 않지만, 살과 튀김옷에 골고루 간을 분배 하는 것 또한 ‘세부 사항’에 신경 쓰는 방편이다.
이 몇 가지 요소를 준수하지 않을때, 음식은 맛있어지는 데 실패한다. 기술적 실패로 인한 맛없음이다. 원인이 방만일 수도, 혹은 숙련도 부족일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같은 실패다. 여기에 ‘적합한 가격’이 설정하는 재료의 수준이 또 다른 맛없음의 영역을 설정한다. 가격과 재료의 관계는 크게 둘로 나뉜다. 첫 번째는 희귀성이 다. ‘세계 3대 미식 재료’라 일컫는 철갑상어 알(캐비어)이나 송로버섯(트러플), 부풀어 오른 거위 간(푸아그라) 등이 여기에 속한다. 맛있음을 절대적으로 보장하므로 비싸다. 두 번째는 신선도다. 싼 재료일수록 신선도가 떨어지고, ‘GIGO(Garbage In Garbage Out)’의 원칙에 따라 음식 맛도 떨어진다. 물론, 두 영역 사이에 느슨히 겹치는 부분도 있다는 사족은 달아둬야 하겠다. 여기까지가 기본적인 완성도의 영역이다. 이 영역이 일정 수준 담보되어야 비평의 진짜 영역인 취향을 논할 수 있다. 맛(flavor)의 전 영역에 걸쳐 취향 논쟁이 가능하지만 특히 결정적인 표정을 좌우하는 향에서 취향이 많이 갈린다. 대표적인 예가 요즘 부쩍 는 베트남 쌀국수의 고수다. 한편 서비스는 정서적 실패로 인한 맛없음을 좌우한다. 가격대가 올라갈수록 서비스의 중요성 또한 커지는데, 한국의 레스토랑이 특히 이 측면의 세부 사항에서 공통적으로 취약하다. 예약 확인 전화를 걸지 않는 등자질구레하지만 중요한 요소에 특히 그러한 현실이 시사하는 바가 있다.
여기까지 늘어놓으면 반문이 바로 꼬리를 잇는다. 그래서 그 ‘잘’ 과 ‘적절함’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인가? ‘입맛은 주관적인 것’ 아닌가? “De gustibus non est disputandum”이라는 말도 있다. ‘취향 (=입맛)은 논쟁 대상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이래저래 음식의 평가, 더 나아가 비평은 무용하다는 게 요지다. 쉽게 반박 가능하다. 일단 모든 판단은 주관적이지만, 그 판단 체계를 구축하는 요소는 한없이 객 관적일 수 있다. 또한 능력이든 지식이든, 주관적 판단력 자체의 차이도 분명히 존재한다. ‘입맛’의 가장 바깥쪽 영역, 즉 생리적인 맛(미각) 부터 그렇다. ‘입맛은 주관적인 것’이라는 말로 무용론을 제기하는 부류는 음식 평가가 미각만으로 가능한 것이라 전제하는 오류를 범한다. 게다가 설사 진짜 그렇다고 해도 시각이나 청각처럼 능력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단위 면적당 맛 봉오리의 밀도가 높은 사람이 맛도 더 많이 느낀다. 이 밀도를 측정하는 검사도 있으며 ‘수퍼테이스터(super taster)’라 일컫는 우수 집단도 존재한다(『Taste What You’re Missing』, p.17., Barb Stuckey, Simon & Schuster, 2013).
그렇다면 지식은 어떠한가. 딱히 부연 설명이 필요 없다. “아는 게 힘이다”라는 말은 왜 존재하는가. 뻔하지만 진실이다. 미술사학자 유 홍준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인기를 얻기 시작할 때, “아는 만큼 보인다”는 슬로건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진위나 출처 여부에 대한 논란이 없지는 않지만, 다른 어느 분야라고 예외겠는가. 음식을 판단하는 지식 기반이 다르다면, 평가 또한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이는 이미 포화상태인 역사 등의 ‘인문학’적 지식은 물론, 음식의 물질성에 충실한 기술적인 측면까지 아우른다. 아주 자 명한문제아닐까.비평가의존재의미나권위에회의를품는것과비 평 자체의 존재를 무시하는 건 별개다. ‘입맛은 주관적이다’라는 말에는 후자의 의도가 짙게 배어 있다. 우문(愚問)에 우답(愚答)하자면, 모든 다른 분야의 예술과 제반 비평 또한 한없이 주관적인 판단에 의해 돌아간다. 개개의 비평, 또는 비평자의 평가나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지만, 그렇다고 해당 문화 분야의 비평 자체의 존재를 부정하는 경우는 없다. 음식 비평도 마찬가지다. ‘주관적 입맛’ 논쟁은 음식비평의 인정 투쟁에 본질적으로 아무런 과제를 안기지 못한다.
음식 비평과 한국의 정서적 풍경
한국의 사정은 어떠한가. 레스토랑 리뷰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적 색채와 상관없이 가장 풍성한 문화면을 자랑하는 <조선일보>조차 시도하지 않는다. 언론 자체의 역사가 짧아서? 그렇다고 보기도 어렵다. 1851년에 창간됐으니, <뉴욕타임스>가 오래되기는 했다. 하지만 <조선일보>도 1920년 창간되었다. 70년의 차이가 커 보이기는 해도, 창간 100주년이 코앞이다. 역사나 저력이 딸려서라고만 볼 수 없다.이유는 따로 있다. 일단은 정서적 측면이다. 꽤 폭이 넓으니 아주 바깥쪽, 즉 음식 외적인 문제부터 훑어야 한다. 하지만 간단하다. 2015년의 한국에는 제대로 된 비평 문화가 없다. 비평의 토양이 몹시 황폐하다. 그 단적인 예가 최근 문학계에서 불거져 나온 신경숙 표절 논쟁이다. 문학 비평을 논하는 지면이 아니므로 현상 이상을 언급하지는 않겠다. 다만, 논란의 와중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개념(또는 현상) 가운데 하나가 ‘주례사 비평’이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쁜 점은 말하지 않는다. 좋은 점은 찾아내 말해준다. 비평할 비(批)자는 원래 ‘손(手)으로 치다’는 뜻이었다. 이후 ‘치다 →때리다 →(때려서) 바 로잡다→비평(批評)하다’ 등의 뜻이 생긴 것이다. 이를 감안하면 주례사 비평은 결국 비평이 아니다.
평론이 존재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다른 예술 제반 분야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주례사’처럼 극단적이고 면구스러운 표현까지 쓰지 않을 뿐이다. ‘비평가’라고 칭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해설자’ 다. 평가나 가치 판단보다 설명의 비중이 더 크다. 좋은 점만 말하지는 않지만 비평이라고 보기 어렵다. 영화가 대표적이다. 이유가 뭘까. 일단 문화권을 막론한 경향이 있다. 비평을 지양하는 글에서 기술적 인 요소를 배제한다. 모를 수도 있고, 갈 수록 복잡한 글 읽기를 싫어하는 요즘의 경향—반(反)지성주의?—를 수용한 결과일 수도 있다.대신 서사, 캐릭터 등에 치중한다. 그 탓에 “비평이 일종의 라이프스타일 저널리즘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Please, critics, write about the filmmaking」, Matt Zoller Seitz, http:// www.rogerebert.com/mzs/please-critics-write-about-the-filmmaking).
한편 한국만의 특수성도 분명 존재한다. 사회 전반에 걸쳐 만연한 문제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일단 학벌, 혈연, 지연 등으로 연결된 좁은 사회가 문제다.모두가 얽혀 있다 보니 비평 시 고려해야 할 입장이 너무 많다. 또한 비판과 비난의 적절한 문법에 대한 개념이 희박하다. 쓰고 말하거나 읽고 듣거나, 적절히 표현할 줄도 흡수할 줄도 모른다. 나의 창작물에 대한 비판을 나 자신에 대한 비난으로 받 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수동적 공격성(passive-aggressive)도 한몫 거든다. 끝없이 에두르거나 말을 돌려 의도를 감춰야 살아남는다. 이런 현실 속에서 직설적이고 경제적인 화법은 공격적이라 낙인 찍힌다.
이 모든 여건 위에 음식이 내재한 정서적 및 감각적 특성이 얽혀 음식 비평의 인정 투쟁을 한층 더 복잡하게 만든다. 전자는 ‘밥상머리 에서 투정 말라’는 가난의 가치관이고, 후자는 ‘입맛은 주관적인 것’ 이라는 면피용 상대주의다. 그 둘이 손을 맞잡으면, 국수주의에 무한 수렴하는 민족주의가 빗장을 쥐어준다. ‘한식이니까 우수하다’는, 고 이규태나 이어령식의 논리다. 꿈보다 좋은 해몽이랄까. 비빔밥이 가장 좋은 예다. 간편함을 좇아야 하는 궁여지책의 산물이었을 가능성 높은 비빔밥이, “고립식이 아니라 관계와 융합을 통한 혼합식의 김치 문화를 극단화한 음식”(『디지로그』, 145쪽, 이어령 지음, 생각의 나무, 2006)으로 탈바꿈하는 논리다. 맵고 단 고추장이 맛을, 깨를 태우듯 볶아 짠 기름이 향을, 찰기 많은 단립종 쌀이 질감을 압도하는 음식이 비빔밥이다. 이래도 저래도 같은 맛의 비빔밥의 가치를 민족주의가 격상시킨다. 그래봐야 본질은 바뀌지 않으니 가치를 올려주지도 못한다. 따라서 자기 만족 외에 큰 의미는 없다. 또한 몰이해도 한 몫 거든다. 서양음식도 각 요소가 고립되지 않는다. 소스가 접시에 담긴 모든 요소의 맛과질감을 한데 아우르는 역할을 맡는다.
그렇게 빗장을 굳게 걸어 잠그고,매체는 음식 문화에 관한 비판적 시각을 원칙적으로 봉쇄한다. 저널리즘은 존재하지만 엄연히 그 일부여야 할 비평은 찾아볼 수 없다. 레스토랑 리뷰 같은 건 안된다. 오직 장점만을 말하는 ‘맛집 추천’만이 유효하다. 음식을 위한 ‘주례사 비평’이다. 한국의 음식 문화에 대한 비판도 거의 불가능하다. 특히 정체성을 두고 갈림길에 놓인 한식은 절대 도마에 오를 수 없다. 이러한 정서가 한국에 음식 비평이 존재하지 못하게 만드는 진짜 걸림돌이다. “표준화되지 않은 한식 조리법”(「음식 평론은 넘치고 담론은 없다」, <경향신문> 2010년 2월 2일자)이 문제가 아니다. 또한 조금 덧붙이자면, 한식의 조리법은 설사 성문화 되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표준화된 상태다. ‘양념+재료’의 문법이 이 미 공감대로 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치에 맞는지 여부를 따지는 건 별개 문제지만 성문화도 되었다. 굳이 쇠고기에는 간장, 돼지고기에는 고추장 바탕 양념을 쓰는 게 좋은 예다.
굳이 <뉴욕타임스>와 <조선일보>의 토양 차이는 직접 경험도 해보았다. 2014년, 토요일 문화면의 음식 칼럼을 격주로 연재한 적이 있다.구체적인 주제 등에 대한 언질 없이 제안을 받았으므로 한식을 위시한 한국 음식 문화의 개선점을 위주로 기획, 원고를 두 편 써 제안했다.유행인 단팥빵을 비롯, 소위 ‘건강빵’의 천연발효종 무용론(건강 효과가 검증된 바 없으며, 단맛 중심 단팥빵에는 의미가 없다)과 뚝배기 등 국물 음식의 극단적인 온도가 주제였다. 결과는 반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원한다는 게 요지였다. 물론 반려의 행간은 아주 넓었다. 비판을 원하지 않는 것. 메우느라 우여곡절을 겪었다. 서너 차례 수정해도 소재와 논조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 하지 못해 심지어 연재 시작 전 고사까지 해보았다. 결국 시작은 했지만 이후도 순탄치는 않았다. 끊이지 않는 원칙적 의견 조율의 어려움으로양측 모두 지쳐버렸다. 결국 연재는 예정보다도 훨씬 일찍 막을 내렸다.
인정 투쟁의 과제 분류
인정 투쟁을 벌이는 입장에서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소화해야 할 까. 나는 현실을 50대 50의 조합으로 인식한다. 위에서 언급한 정서적이유의 근간이 둘로 나뉘는데, 각각 변화 가능 및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한다는 말이다. 후자부터 살펴보자. 간단히 말해 현존하는 주류 음식 세계관의 안티테제다. 역사학자 레이철 로던(Rachel Laudan)의 표현을 빌자면, 음식 모더니즘(Culinary Modernism, 주류)에 반하는 러다이즘(Luddism, 비주류)이다.4) 빠르고 효율적인 현대적 대량 생산에 반대하는 모든 과거 회귀, 또는 보수적 개념을 한데 아우를 수 있다. 유기농을 비롯해 동물복지, 제철 및 지역주의, 유전자 조작 식품(GMO, Genetically Modified Organism) 반대를 비롯해 공정무역, 슬로푸드, 소 량 생산 공방 음식(artisanal food, 치즈나 빵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화학 조미료나 설탕, 밀가루, 고기의 마블링(marbling, 살결 사이의 낀 지방) 처럼 개별 식재료에 대한 음모론에 가까운 건강유해론까지 포함한다.
러다이즘은 세계적인 경향인데다가, 기본적으로 두려움에 호소하는전략을 쓰기 때문에 아주 잘 먹힌다. 또한 수용자는 대개 정치적 입장을 바탕으로 종교에 가까운 신념을 품고 있으므로 쉽사리 설득 당하지도 않는다. 과학에 바탕한 반론이 존재하더라도 인정하지 않는 것. 음식 러다이즘의 기세가 꺾일 거라 생각하지 않는 이유다. MSG 유해론이 가장 높은 인지도에 빛나는 예다. 아무리 무해론을 설명해도 믿지 않는 사람은 믿지 않을 뿐이다. ‘어쨌든 언젠가는 건강에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다’라는 입장에서 물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에 상관없이 반론은 필요하다. 적어도 입지의 고착화는 막아야 한다는 취지에서다. 현존하는 악(모더니즘)과 선(러다이즘)의 이분법 구도 말이다. 비판적 고찰 없이 모더니즘을 어둠으로, 러다이즘을 빛으로 인식하지만 현실은 정확히 그렇지 않다. 선악의 위치도 고정된 것이 아니며 사이에 엄연한 회색지대가 존재한다. 또한 흔히 모호함을 의 미하는 원래 표현 “shades of grey”와 달리 그 음영이 아주 선명하다는 것 또한 증명할 필요는 있다. 한마디로 칼로 무자르듯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위에서 나열한 모든 모더니즘-러다이즘의 대립 관계에, 논박에 가까운부연설명이가능하다. 이제는 실생활에 가장 널리 퍼진 유기농을예로 들어보자. 큰 그림을 본다면,유기농은 결국 자연선호사상—이제 ‘주의’라 일컬을 시기는 지났다—이다. 농약, 화학비료 등으로 인간이 몰아붙이는 단품종 대량 경작(monoculture)에서 벗어나, 자연 조건과 지력에 의존하는 다품종 소량 경작(multiculture)의 소규 모 네트워크를 연결하자는 개념5)이다. 장밋빛으로 들리지만 일단 전제 자체에 결함이 있다. 자연이 정확하게 자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오랜 세월에 걸쳐, 문자 그대로 입맛에 맞게 자연을 뜯어고쳤다. 맛과 생산량의 개선을 위한 품종개량 말이다. 따라서 식용 작물은 진짜 자연에서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없다.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 만큼 더 많은 인력을 투입해야 유지 관리가 가능하다. 미국 전역의 사정이 똑같지만, 특히 유기농산물의 최대 생산지인 캘리포니아 주의 생산력은 불법 이민 노동력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나머 지 자원도 마찬가지다. 하루 아침에 지구 전체 식재료가 유기농으로 전환된다고 가정해보자. 현재 지구의 자원, 특히 물로는 감당할 수가 없다.지구 전체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없다는 말이다. 맛과 영양, 안전의 측면에서도 유기농이 월등히 우월하다고 보기 어렵다. 유기농이 맛과 영양의 우월함을 자동적으로 보장하지 않으며, 비유기농과 비교 해 안전도의 격차는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
러다이즘의 거의 모든 논리가 이런 식으로 부연 설명 및 논박 가능하다. GMO? 인류가 지금까지 해온 품종개량의 일부다. 1930년 이후, 인류는 방사능 노출을 통한 품종개량도 지속적으로 실행해왔다. 또한 음모론 이상으로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이 밝혀진 바 없고, 아프리카 등 만성 기근에 시달리는 지역에는 유효한 해법이다. 지역 주의는 어떤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거리에 반비례한다는 논리다. 하지만 집약적 재배 및 사육과 운송 체계가 ‘탄소 발자국(carbon footprint)’를 최소화한다. 공교롭게도 양의 해를 맞아 한국에서 인지도를 넓히는 양고기의 경우처럼, 뉴질랜드 등에서 수입하는 것이 가까운 대관령의 것보다 환경에 영향을 덜 미칠 수 있다는 말이다. 곡물 비육과 마블링은? 풀 먹인 고기는 특유의 누린내를 풍길 수 있으며 마블링이 없으면 고기는 더 질길 수도 맛이 떨어질 수도 있다. 지방이 맛의 매개체이기 때문. 하지만 풀 먹인 고기의 가격이 더 높다. 소비자는 때로 그 사실조차 모른 채 풀먹은고기가 우월할 거라는 생각에 선택의 폭을 넓히려다 망설이게 된다.
물론 음식 러다이즘에는 긍정적인 역할도 있다. 한마디로 다양성을 확보해준다. ’더 많은 인력=품질의 향상=가치 제고’라는 공식에 입각, 음식 러다이즘은 고급 외식의 핵심이다. 일단 재료부터 그렇다. 유기농 목장의 고기, 손낚시로 잡은 생선, 소규모 공방의 빵이나 치즈, 레스토랑 자체 운영 텃밭 등에서 나온 채소 등을 쓴다. 이를 많은 요리사의 분업 체계를 이용, 손질 및 요리한다. 단순노동력이 아닌,문제 해결 능력을 지닌 고급 노동력의 집약적 접근이다. 하지만 고급 외식 자체를 음식 러다이즘의 발현이라 보기는 어렵다. 기술집약적 측면도 있기 때문. 저온 조리기, 원심 분리기 등 최신 과학기술의 산물 인 조리기구로 효율성을 좇는다. 말하자면 ‘흑묘백묘론’에 입각한 절충적 접근이며 인간과 기계의 혼재다. 손님에게 최고의 경험을 선사 한다는 원칙 아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한마디로, 맛있으면 그만인 것이다. 결국 음식 러다이즘 또한 양날의 칼로, 본질적으로는 회색지대의 뚜렷한 음영에 공헌한다.
한편 나머지 절반은 한국 음식 저널리즘 종사자 다수가 견지하는 포지션인 ‘부엌의 타자’다. 바뀔 수 있고 또 바뀌어야 한다. 음식의 울 타리 안쪽에서도 당연히 의미 있지만, 사실 바깥쪽에서 더 중요하다. 오랜 세월 고착된 부엌의 성역학관계를 해체할 기회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삶의 영역 전체에서 벌어지고 있는 성의경계 및 차별 철폐에 부엌의 타자 몰아내기가 핵심 과업이라는 말이다. 사실 음식저널리즘 전체를 볼 때 변화 또는 전이는 이미 현재진행형이다. 브리야사바랭 같은 마초 관료가 선구자 역할을 했지만, 이제 서양 음식 저널리즘에서 부엌의 타자는 발언권을 계속해서 잃어가고 있다. 대략 세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성역학관계의 변화다. 남녀평등을 넘어 동성결혼 합법화까지, 성역할을 향한 보수적 편견의 해체가 얼개를 잡고 있다. 둘째, 인간의 육체적 속성에 얽힌 음식만의 특성이다. 조리의 기술적 측면이 요리 이해의 열쇠다. 삶과 육체에 워낙 밀접하다 보니 비평이 필요한 여느 예술분야보다 더 쉽고도 깊은 이해가가능하다. 셋째,이를 위한 여건이 역사상 어느 때보다 잘 발달되어 있다. 한마디로 조리 교육이 대중 적이고 또한 체계적이라는 말이다. 동네 조리기구 전문점에서 벌이는 간단한 시연 및 체험 수업부터 18~24개월에 이르는 조리학교 정식 입학까지 다양하다. 부엌의 타자로부터 벗어나고픈 의지만 있다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이러한 여건을 바탕으로 요즘은 요리학교 졸업 후 바로 음식 저널리즘-비평 쪽으로 선회하는 경우도 눈에 띈다.
이에 비하면 한국 음식 저널리즘은 갈 길이 멀다. 선구자 격인 허 균(1569~1618)과 정약용(1762~1836) 이래 아직까지도 주방의 타자- 남성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 비판적이든 아니든, 음식 문화를 활발히 논한 인물들을 살펴보라. 공통점을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이규태나 이어령은 물론, 여러 권의 맛집 유랑기와 더불어 “선주후면 (先酒後麵, 술을 먼저 마시고 면을 먹는다는 뜻)”이라는 표현을 남긴 소설 가 백파 홍성유도 있다. 스스로를 “먹을 것만 탐한 사람”이라 지칭하 는 데 거리낌이 없었으며 부임지, 심지어 유배지마저 특산물이 있는 지방으로 로비를 벌여 갔다는 450년 전의 사대부 남성 허균과 크게 다르지 않은 포지션이다. 좋게 말하면 풍류를 누리는 캐릭터였고, 나쁘게 말하면 ‘에미야 국이 짜다’를 고민 없이 뱉을 주방의 타자다. 음식 저널리즘 종사자들이 ‘음식 비평은 시기상조다’와 같은 발언을 하 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 대부분이 부엌의 타자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그럴 의향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꾸 ‘-학(學)’이나 정치의 경계로 음식을 몰아붙인다. 대표적 존재가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이 다. 주방의 타자라는 공통점 아래, 그의 포지션은 일종의 ‘하이브리드’다. 소위 ‘386세대’의 반미 및 반자본주의와 <농민신문> 기자의 전력이 한데 얽힌 음식 러다이즘과 부엌의타자에 충실한 보수적이고도 가부장적인 태도를 각각 절반씩 취한다. 그 결과 ‘음식의 문제를 정치로 해결한다’가 그의 전방위적 비판의 만트라다.
최근의 백종원 비판이 그의 포지션을 잘 보여준다. 음식 러다이즘에 입각해 백종원이 즐겨 쓰는 설탕을 비판하는 한편 “인간은 적당히짜고 달기만 하면 맛있다고 느낀다. 그 밸런스를 맞추는 것은 쉽다(<한국일보> ‘눈(SNS)사람’ 인터뷰, http://interview.hankookilbo.com/v/ c607ba4cca144794a8a7caf36db10589/#1000)”며 주방의 타자로서 조리의 육체성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었다. 이러한 비판이 공격을 받자 특 유의 ‘엄마론’을 펼쳤다. ‘엄마가 맞벌이를 나가 사랑을 받지 못한 80 년대 이후 출생자들이 백종원을 ‘대리 엄마’로 인식한다(「‘백주부’ 백종 원에 열광? 맞벌이엄마 사랑 결핍 때문」, 황교익, <문화일보> 2015년 7월 10 일자)’는 것이다. 양육과 조리를 비롯한 가사 노동은 여성의 몫이라는 가부장적 시각이다. 여기에 “국가는 엄마가 자신의 품에서 자식을 온 전히 키울 때까지, 적어도 6세까지, 경제적으로 완벽히 보장해주어야 한다(「말하지 않은 것도 말하였다 하는가」, 황교익 블로그, 2015년 7월 12일, http://foodi2.blog.me/220418145724)”는 정치적 포지션-포퓰리즘?—이 모두를 한데 아우른다.
이러한 황교익의 극단적인 포지셔닝이 한국 음식 비평의 인정 투쟁 의 마지막이자 사실은 처음인 과제를 설정한다. 음식을 바라보는 온갖 필터의 범람 속에서, 음식을 음식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 맛에 대해 더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음식을 예전에 비해 더 유행 타는 대상으로 취급한 나머지, 식사는 더 사소한 문제가 되어버린” 현 실이라고 했다. 우리는 음식과의 관계 조절에 능숙하지 않다. 대개 너무나도 가깝다고 생각하는 나머지 거리를 벌리고 만다. 음식을 정치의 산물이나 추억의 매개체 취급함으로써 한없이 영혼의 영역으로 보 낸다. 또한 정반대로, 때워야 하는 에너지원-음식이라기 보다 연료- 으로만 인식해 한없이 육체적 영역으로 보내기도 한다. 필요한 건 균형이다. 육체로 화한 영혼으로서 인간이자 개별적 존재를 만족시켜주 는 음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결국 맨 처음 언급했던, 가치를 높여주는 비평이다. 사실은 중립 지점을 찾아주는 비평이지만, 외적 가치에 휩쓸려 워낙 산지사방에 흩어진 음식의 좌표를 감안하면 그 제자리를 찾아줄 때 역설적으로 음식의 가치가 올라가는 것이다.
-<21세기 문학> 2015년 여름호
4) 자세한 설명은 저자의 『A Plea for Culinary Modernism』를 참고할 것. https://www. jacobinmag.com/2015/05/slow-food-artisanal-natural-preservatives/
5) 미국의 셰프 댄 바버(Dan Barber)의 근저 『The Third Plate』가 이에 대해 논하고 있다.
Welcome b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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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머리에서 투정 말라.”
한국의 음식비평의 부재 문제에서는 이게 가장 큰 원흉일 듯합니다.
음식에 대해 까다롭게 구는 사람은 성격 파탄자로 눈총이나 받기 십상이죠.
남들 다 먹는 거 안 먹는 사람도 마찬가지이고요.
한국에서 채식주의자로 6년 사는 동안 두 배로 빨리 늙어 12년치 노화와 피로를 겪은 것 같습니다.
남들과 식사할 때마다 끊임없이 ‘왜 고기를 안 먹는지 납득 가게 설명 좀 해보라’는 요구를 받고
고기 중심의 단일 메뉴집이 많아 모임에서도 성가시고 불편한 존재 되기 일쑤였죠.
한국은 밥 잘 안 먹는 아이는 다른 아이보다 미뢰가 많아 그런 거라며 한의원들이
그 보들보들한 아이의 혓바닥에서 미뢰를 죽이는 ‘치료’도 다 하는 나라입니다.
이런 아이는 커서 테이스팅 관련해 큰 일을 할 수도 있을 텐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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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신 대로 한국에서 비평은 음식 쪽에서만 부재한 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다 부재합니다.
비평하고 토론하는 습관을 못 들인 채로 유럽 와서 학위 따느라 정말 힘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언어가 안 돼서 힘든 것으로 생각했는데
언어 문제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데 문제가 있음을 느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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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신문들에서 ‘당연히’ 보는 레스토랑 비평을 한국 신문에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식당들 수명이 하도 짧아 비평을 하려 해도 참 애매할 것 같기는 합니다.
좋은 글 감사히 읽고 갑니다. 여기는 정말 희소성 있는 공간이네요..
1. 한국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입시나 취업공부를 하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대화와 토론, 거기서 발전한 논리적 비평이라는 것 자체를 제대로 할 줄 모르거나 이를 불편해한다는 문제는 비단 음식비평 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2. 그러나 한편으로 한식의 현실이나 비평의 척박함은 아무런 맛이 없는 흰 쌀밥을 넘기기 위한 수단으로 반찬이 존재하다보니 별도의 요리가 발전하기 어려운 것도 그 이유가 아닌가, 다시 말해 쌀밥을 주식으로 한다는 동아시아만의 매우 예외적인 특수성 자체에 의해 필연적으로 일정 부분 제약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일단 밥의 부피가 크다보니 반찬은 맛의 균형보다는 짜거나 매움이 우선이고, 쌀에 전분함량이 높아서 끈기가 많아 잘 넘어가지 않고 목이 막히니까 이를 씻어내기 위한 국이 필요할 것입니다. 특히 나이를 먹으면 침 분비량이 적어져서 국이 없이는 식사를 하기 어려워집니다. 예전에 말씀하신 ‘국에 들어가는 뭉그러져서 맛없는 야채 건더기’ 문제도 이와 관련이 있는게 아닐까 싶은데, 그 건더기들은 밥을 풀어서 넘기기 위한 도구가 아닐까 의심하고 있습니다. 국물을 듬뿍 머금은 부드러운 섬유질이 있으면 여기에 끈기있는 밥을 섞어서 풀어 넘기기 좋겠죠. 게다가 맛이 음식 자체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먹는 사람이 입안에 밥과 반찬을 떠넣어서 ‘스스로의 맛’을 혀 위에서 다시 맞추어 먹는다는 특징(짜면 밥의 양을 늘리면 되므로 음식의 간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같은 것이겠죠.
3. 사실 이 문제에 대한 유일한 레퍼런스는 일본일텐데, 일본인들은 반찬의 숫자보다는 양에 집중하는 성향이 한국보다 높고(한국사람들이 일본에 가면 반찬을 적게 준다고 뭐라고 하는데 반찬 하나하나의 완성도는 한국보다 높더군요), 반찬과 밥을 하나의 그릇에 요리로 묶어서 먹는 돈부리 문화도 한국보다 발달하여 한국에 비해 반찬이 아닌 요리라는 측면에 있어서는 분명히 우리보다 질적으로 앞서나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게다가 양식을 한국보다 많이 먹다보니 도구로의 반찬에 국한되지 않는 요리나 식사문화의 질과 다양성까지 갖추고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도쿄에 가서 보니 50대 아저씨들이 팬케익이나 파스타를 그냥 식사로 드시더군요). 물론 동일한 쌀밥문화임에도 일본은 국이 발달하지 않았으므로 밥문화와 한국 음식문화의 연관성이 필연적인 것은 아니라고 반론한다면 이 가설 자체가 무너질 수는 있겠습니다.
4. 개인적으로는 무미의 쌀밥과 맛이 진한 반찬과 국(위에서 말씀드렸다시피 고항과 오카즈 정도를 제외하면 이와 비슷한 식문화는 아마 없을 것 같습니다만)이라는 특수성에 집중하고 이를 일본과 비교해 본다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외국의 그것에 근접한 음식평론을 볼 수 있는 곳이 여기밖에 없어서 평소에 한번 드려보고 싶었던 말씀인데 조금이나마 관심거리가 될 수 있다면 영광이겠습니다.
오타가 있군요. 3번에 ‘일본인들은 반찬의 숫자보다는 양에 집중’에서 양이 아니라 질입니다. 말씀 안드려도 당연히 아시겠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