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이대기’와 ‘판 벌리기’-불안함과 욕망의 음식 문화
요즘의 홍대 거리는 나름의 재미를 품고 있다. 물론 홍대에 감정이입하는 분들을 위해 미리 한 자락 깔아두자면, 이러한 재미는 홍대만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장 대표적이고 또 강렬하다. 그래서 어떤 재미인가. 거칠게 표현하자면 비웃는 재미고, 대상은 정제되지 않은 감정인 불안감과 정제되지 않은 욕망이다. 돈은 벌고 싶은데(욕망) 확실한 자기 것은 없다(불안감). 이 둘이 만나면 괴상한 것들이 탄생하는데 패턴은 크게 ‘들이대기’와 ‘판 벌리기’로 정리할 수 있다. 들이대기는 말 그대로 들이대는 것이다. 일단 존재를 시각적으로 알려야 한다. ‘제발 아무나 걸려라’ 같은 마음으로 뿌리는, 눈이 아주 촘촘한 시각성의 그물이다. 간판이 대표하는 디자인의 경향이 한 방향으로 흘러 간다.
이러한 경향은 비단 식문화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책의 표지 디자인, 요즘 유행하는 라인-카카오톡의 캐릭터 등등에서도 공통적인 ‘기운’을 읽는다. 물론 시각성은 기본이 압도적인 감각이고, 어쨌든 눈길을 끌어야 한다. 하지만 그 방식에서 일관적인 패턴을 읽는다. 한마디로 크고 굵다. 비단 홍대만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던 골목조차 놀이공원, 더 나아가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했던 먹자골목의 분위기를 느낀다. 프랜차이즈의 디자인 언어로 도배된 ‘젠트리피케이션’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그보다 더 조악하고 영세적이어서 더 불안해보인다.
이러한 경향이 음식에서 발현하면 시각성에 ‘올인’한 괴식이 등장한다. 사진을 찍지 않았는데, 어느 골목의 ‘이탈리안 소울 푸드 레스토랑’에서 오징어를 통으로 올린 ‘피자’를 보았다. ‘오징어와 도우가 따로 노니 이것을 과연 피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같은 의문을 품는 건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고, 맥락에 따라 지극히 속물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런 피자의 세계와 이런 “피자”의 세계는 완전히 별개다. 이젠 웜홀을 사이에 두고 따로 존재하는, 다른 의식의 은하계에 각각 속한다. 아니, 차라리 그런 상황이라면 서로 존재를 모르거나 볼 필요가 없어 낫겠지만…
한편 시각성에 의존한 괴식은 저런 종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또 다른 유형이 있다. 나는 이걸 ‘판 벌리기’라고 부른다. ‘뭐든 다 던져보고 벽에 뭐가 달라붙는지 보자(throw everything to the wall and see what sticks)’이라는 영어 표현이 떠오른다. 일단 가능한 건 다 끌어오는, 필사적인 생로의 모색이다. 허울 좋게 ‘편집샵’이지만 결국 그냥 시중에서 잘 팔린다는 건 다 모아 놓은 구멍가게식 식품점이나, 심지어 ‘콘템포러리’라는 명목 아래 내재적인 장르가 전혀 없음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파인 다이닝 또한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지금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한국 가수들이 새 앨범을 내면 ‘저는 뭐 좋아하는 장르가 없습니다. 이 앨범엔 그런 장르 같은 걸 추구하지 않았어요’라고 인터뷰를 했는데 그 생각마저 난다. 도구로 전락한 인간이라고 하면 너무 과한가.
골목골목 편의점이 빼곡하게 들어섰다가 그것마저 망하는 형국에서 이런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환하게 태우는 생명의 불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모든 존재가 똑같이 온 몸에 바람을 잔뜩 불어 넣고 똑같은 목소리로 울다가 다 함께 폭발해 가라앉는다. 이익활동이라는 게 최소한의 피아구분은 있어야 지속가능할 것 같은데 모두가 다 똑같이 한 점으로 질주하고 있다는 생각 밖에 할 수가 없다. 여기가 임계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