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국밥)과 토렴, 국물과 밥의 상관 관계


IMG_8607토렴은 과연 필요한가? 9-10월 부산 출장길에 ‘미션’ 수행하듯 돼지 국밥을 한 그릇씩 먹고 왔다. 각각 당일치기와 1박 2일짜리 일정이었으니, 먹을 수 있는 끼니수를 감안하면 정말 노력해서 먹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중앙역 근처 골목이었다. 딱 20년 전 돼지국밥의 기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1995년 12월, 부산시청 근처의 어느 큰 음식점에서 먹은 아침이었다. 전 지역이 1일 생활권화 된 현실이라 맛의 지역성도 그만큼 흐려졌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가운데 돼지국밥은 여전히 그러한 가치를 품고 있는 음식 대접을 받는다. 맛도 맛이지만, 물성을 놓고 지역성과 관계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차, 토렴의 문제를 제기한 이 글에 달린 여러 덧글을 보고 한 번 정리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출발점은 당연히 매개체인 국물이다. 두 갈래로 생각해보았다. 첫 번째는 질감(정확하게는 감촉 mouthfeel)이다. 한식 고깃국물은 모순된 가치를 좇는 경향이 있다. 동물을 우려내지만 맑거나 ‘담백’해야 한다고 여긴다(그렇게 국물을 뽑아놓고 강한 맛의 김치를 곁들여 먹어 의미를 전부 날려 버리지만). 비단 돼지국밥의 국물만 그런 것도 아니다. 전국 메뉴인 쇠고기 바탕 국물 음식, 설렁탕이나 곰탕도 대체적으로 맑다. 아니, 정확하게는 ‘멀겋다’는 형용사를 쓰는 게 맞을 것이다. 기름기가 떠오르거나 뽀얗기는 해도 혀와 입천장을 감싸는 진득함이 빠진 경우가 많다. 지방과 젤라틴이 빠진 탓이다.

지방의 배제는 동의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이해는 할 수 있다. 지방에 대한 선입견이 분명히 존재한다. 너무 많으면 방해가 될 수도 있다. 굳혀 떠내기만 하면 되니 걷어내기도 쉽다. 하지만 젤라틴은 어떤가. 생각하면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부위별로 나눠 국물을 우리는 문화를 감안하면 생각이 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젤라틴을 선택적으로 얻을 수 있는 가치라고 여기는 것이다. 사골로 우리는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말단부위, 더 나아가 그 사이 연골을 제거한 뼈에서는 맛에 크게 공헌할만한 요소가 우러나오지 않는다. 사골만으로 우리면 맛이 없으니 양지 등을 섞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반면 도가니나 우족 등도 따로 우리지만, 재미있는 건 이마저도 콜라겐이 완전히 분해될 정도로 끓이지는 않는다. 족탕이라면 뼈에서 껍질이나 살 발라내기 어렵고, 도가니 또한 푹 무르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러한 부위의 가치-위계질서와 얽힌 젤라틴의 유무가 한편 토렴을 정당화할 가능성에 주목한다. 한마디로 없는 재료에서 멀건 국물을 우려 놓고, 토렴을 통한 밥의 전분으로 진득함을 보충하는 것이다.

IMG_8041두 번째는 온도다. 양 극점은 이루기 쉽지만 중간지대를 일부러 좇거나 유지하는 것은 어렵다. 뜨겁게 먹는 국물이라면 항상 끓여 놓는 것이 편하다. 여기에 식은 밥을 토렴하면 온도가 내려가고, 그 결과 빨리 먹을 수 있고 회전율이 빨라진다. 하동관의 곰탕 온도가 낮은 궁극적인 이유도 결국 이렇다 들은 바 있다. 계속 가보면 일정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편하게 먹을 수 있는 목표 온도를 수치로 정해놓지는 않았을 것이라 예상한다. 다분히 우연의 산물이라는 의미다.

밥의 측면에서도 살펴보자. 토렴의 미덕을 소비자의 측면에서도 ‘먹기 편함’이라 보는 시각이 있다. 동의하지 않는다. 빠른 회전 이상의, 소비자의 시각에서 추구해야만 할 먹기 편함을 추구하려면 밥을 굳이 100% 익힐 필요가 없다. 밥솥에 지은 밥은 그 자체로 조리가 완료된 음식이다. 이를 토렴하면 지나치게 불거나, 상태가 안 좋은 쌀과 밥이었다면 부서져버리는 경우도 많다. 진정 토렴이 소비자를 위한 가치라면, 또한 그 가치를 현대에도 유지하고 싶다면 그 과정을 통해 조리가 완결될 수 있도록 얼마든지 반조리(parcook)할 수 있다. 파스타, 특히 삶는데 10분 이상 걸리는 건면은 시간을 줄이고자 할 경우 반조리한다. 덜 삶아 놓거나 물에 불린다. 포장마차 등에서 파는 소면 등이 반조리의 산물이던가? 아니다.

IMG_8042부산에서 두 번에 걸쳐 먹은 돼지국밥은 모두 토렴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 조리와 보관 등등을 더 낫게 할 방법이 얼마든지 존재하는 오늘날에는 굳이 토렴을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극단적인 경우를 상정하자면, 반조리한 밥을 냉동 및 진공 포장했다가 펄펄 끓는 국물에 더해 온도와 질감을 동시에 맞추는 방법도 가능하다. 한편 토렴의 문제를 밥의 물성과 연관지어 생각할 필요도 있다. 밥은 알곡을 삶아 만든다. 그 과정에서 전분 때문에 서로 달라붙어 덩어리를 이룬다. 그것이 밥의 기본적인 물성일텐데 이를 국이나 물에 말아 굳이 풀려 애쓴다. 잘 풀어지지도 않지만 결과물이 바람직하다고 보기 어렵다. 최소한 밥알을 즐길 수 있는 상태는 깨진다. 그럼 왜 굳이 말아 먹어야 하는가. 모든 음식에서 씹는맛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는데, 왜 밥에는 수분을 더해 씹지 않고 넘기려 드는가. 혹시 즐기지 않고 식사를 해야 하는 환경의 산물이 미덕처럼 굳어진 건 아닐까? 이미 익어 그냥 넘겨도 소화는 된다. 하지만 꼭꼭 씹어 먹기에는 수분이 너무 많이 개입하는 게 국에 만 밥이다.

마지막으로 습관의 정당화. 언제나 말하지만 전통과 습관은 구분해야 한다.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즉 최종 음식의 완성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있다면 재고해봐야 한다. 정확한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않고 개선 방안이 분명히 존재한다면 고집할 필요가 없다. 감정적 가치가 실제적 가치에 일정 수준 이상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감정적 가치를 걷어내고 볼 여력이 안된다면 아예 의견을 보태지 않는 것이다 낫다. 세상에 ‘원래 그런 것’이 대체 얼마나 존재하는가. 그리고 ‘원래 그렇다’가 어떤 의미로 사회에서 쓰이고 있는가. 핑계의 땔감 아니던가?

2 Responses

  1. Hyoin Choi says:

    ㅎㅎ 고향이 부산인데.. 난생 처음 돼지국밥을 먹었을 때가 기억나네요. 아빠가 “새하얀 식탁보도 깔려있는 좋은 음식점” 에 가는 거라 꼬셔서.. 새하얀 달력지가 깔려있던 기사식당(?) 비슷한데 였습니다..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