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과 마카다미아: 단순화의 필터
1월 1일, 목욕탕에 갔다. 마치고 옷을 갈아 입는데 사람들이 넋을 놓고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토토가’였다. 터보였던가. 그때와 똑같이 입고 나와서 똑같은 춤을 춘단다. 그때는 좋아했던 것 같지만, 이제 보니 별 감흥이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내가 과거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지난 시간은 그냥 지난 시간이다. 그리고 난 어느 시점이든, 과거의 나를 한 번도 지금보다 나은 존재라 여긴 적이 없다. ‘잘 나갔던 그때’가 없는 인간이라서 그런가.
각설하고, 그런 생각을 했다. 왜 우리는 지금 저런 쇼를 보아야 하는가. 정말 원해서 택하는가, 아니면 그냥 가까이에 있기에 택하는가. 한편 방송국은 저런 쇼를 왜 만드는가. 간단히 말해 필요가 공급을 낳는가, 아니면 공급이 필요를 만들어 내고 있는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발생 이후로 계속 궁금함을 품었던 다른 사건에 대해 생각했다. 바로 ‘땅콩 회항’이다. 전말은 매체에서 다룰만큼 다루었으니, 내가 동어반복을 할 필요는 없다. 매체에서 너무 다뤄서 지겨울 지경이다. 다만 헤드라인이 왜 굳이 ‘땅콩’으로 나가야만 했는지 궁금했다. 같은 식재료로써 땅콩과 마카다미아는 격이 철저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게 지나친 단순화며, 틀에 끼워 맞추는 시도라고 생각했다. 이런 이야기를 트위터에서 했더니 재미있는 반응이 나왔다. 그것은 매체의 생리이며, 영어권 매체에서도 헤드라인에서는 ‘Nut’으로 내보냈으니 똑같지 않느냐는 것. 아니다, 다르다.
먼저, 매체의 생리라는 주장은 이해하고 또 원론적으로 동의한다. ‘기레기’ 없는 인터넷 세상부터 헤드라인은 존재해왔다. 요약이든 뭐든 일단 독자의 눈을 끌 단순한 문구가 필요하다. ‘마카다미아’가 길다면 줄여야 한다. 거기까지는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카다미아가 땅콩과 Nut이 된 사고의 흐름이 똑같을 수는 없다. 영어권 국가부터 생각해보자. 그네들은 종종 언어유희를 쓴다. 두운이나 각운을 맞추거나 발음이 비슷한 단어 등등을 써서 중의적인 표현을 이끌어낸다.
여전히 대표적인 예로 기억하는게, 야구선수 배리 본즈가 행크 아론의 단일 시즌 홈런 기록에 도전하던 시절의 스포츠 매체다. 워낙 잘 했지만, 특히 더 활약이 좋았던 날이면 ‘Barry Good’과 같은 헤드라인이 종종 나왔다. 그의 이름인 Barry가 Very와 발음이 비슷하니 ‘베리 본즈가 (아주) 잘했다’는 의미를 동시에 담을 수 있다. 이 사건이 영어권 매체에서 ‘Nut Rage’,’ Go Nuts Over Nuts’라는 헤드라인을 달고 등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견과류(Nut) 때문에 지랄했다(go nuts)’는 의미를 동시에 담을 수 있는데, 게다가 ‘Go Nuts’는 그네들이 워낙 잘 쓰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건 직후 쓴 글에서 나는 ‘아마 신난다며 헤드라인을 뽑았을 거다’라고 언급한 바도 있다.
그에 비하자면 ‘땅콩회항’의 효과는 떨어진다. 헤드라인으로서 사건의 개요를 소개한다는 기본적인 역할은 수행하지만 중의적인 효과, 그도 아니면 ‘말맛’을 주지도 못하고, 사건의 뉘앙스 자체를 희석 또는 오도할 가능성도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땅콩이 견과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견과류는 무엇인가. 대개 1. 단단한 껍질에 싸여 있다, 2. 열매인데 껍질 안에 한 개만 들어 있다, 3. 먹을 수 있다는 조건을 내세운다. 그에 비하면 땅콩은 이름처럼 ‘땅에서 자라는 콩’으로 애초에 콩과(legume)에 속한다.
물론 이 분류도 100% 맞는다고 볼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먹어도 되는 씨앗’으로 퉁치는 경우, 땅콩도 견과류에 은근슬쩍 깍두기처럼 끼어 돌아다닌다. ‘Benefits of Nuts’로 구글 검색을 해서 맨 처음 나오는 열 편 정도의 글을 읽어보면, 이에 대한 의견이 다양하다. ‘땅콩은 콩이지만’이라고 단서를 붙여 놓고 함께 소개하거나, 그렇기 때문에 아예 빼버리거나, 그도 아니라면 그거 없이도 견과류에 속하는 것들이 많으니 언급조차 안하기도 한다. 한술 더 떠서, 식물학적으로 분류하면 또 갈린다. 대표적인 견과류라고 여기는 아몬드나 피칸 등이 핵과류(drupe)에 속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식재료의 측면에서 억지로 견과류 취급을 해준다고 해도, 땅콩과 마카다미아의 가치는 꽤 차이 난다. 내가 견과류를 사는 지마켓의 다반사 몰에서 100g당 가격을 비교해보았다. 땅콩은 470원, 마카다미아는 3,167원. 후자가 약 6.7배 비싸다. 굳이 우리나라라서 그런 것도 아니다. 아마존에서도 가격비교가 가능하지만, 그보다 마카다미아 넛 버터가 있는지 검색해보면 된다. 땅콩버터야 워낙 대중화되었고, 요즘은 아몬드버터도 흔하다. 하지만 마카다미아 버터는 거의 없다. 좀 더 찾아보면 미용을 위한 기름 등이 제품화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땅콩 기름은 미용에 쓰지 않아도, 마카다미아 기름은 쓴다. 이를 종합하면 단순화 외에 마카다미아를 땅콩으로 바꿔 얻을 수 있는 효과는 없다.
게다가 전반적인 차림새가 촌스럽다고 생각하지만(이건 아시아나도 마찬가지다), 마카다미아는 이코노미에는 안 내는 그들 나름의 고급화 제스처다. 결과만 놓고 보면 문제지만, 그것이 땅콩 때문에 벌어지는 것과 마카다미아 때문에 벌어지는 것은 맥락이 전혀 다르다. 저 헤드라인 때문에 독자가 ‘그깟 땅콩 때문에’라고 생각한다면, 혹 그들은 호도당하는 것은 아닌가? 이를 확인하고자 연합뉴스 홈페이지를 검색했다. 가장 오래된 기사는 12일자다. 제목엔 ‘땅콩 회항’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정작 내용에서는 ‘마카다미아 넛을 봉지째 건넨…’이라고 쓰고 있다. 기사의 내용으로 보아 사건 이후 맨 처음 나온 건 아닌 것 같은데, 이미 문제의 근원이 땅콩이 아니라는 걸 안다면 견과류도 아니고 가치도 훨씬 떨어지는 땅콩을 왜 굳이 고집할까? ‘마카다미아’가 너무 길다면 ‘스낵’은 왜 안 됐을까? 두 음절로 길지도 않고, 의미도 그럭저럭 통한다.
이쯤에서 나의 경험을 이야기해보자. 여름에 잠깐 했던 신문 기고 이야기다. 예정보다 훨씬 짧게 끝났다. 그 이야기를 구구절절이 늘어놓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지금껏 해온 외부기고 가운데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한마디로 무난하게 표현하다면 ‘갈등이 많았’다. 프리랜서로서 각 매체의 ‘톤 앤 매너’에 맞추는 건 꼭 갖춰야 할 직업적 역량이지만, 그게 모든 매체에 가능한 건 아니다. 짧은 기간 동안 관리 담당자와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장 많이 들은 표현이 ‘쉽게’였다. “초등학생”이나 “전라도 시골의 필부필부”라는 표현 등이 독자를 묘사하는데 쓰였다.
그래서 많은 게 많이 바뀌었다. 원래 이런 글을 쓰려던 계획이 통째로 바뀌었다. 음식 관련 윤리 문제 등등도 별로라는 의견이 나왔다.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을 언급했는데 그 표현도, 맥락도 너무 어렵다며 문장인지 단락을 통째로 들어냈다. 물론 이건 지면에 실리기 전에 합의-라고 말할 수 있다면-를 해서 바꾼 것이었다. 물론 안 그런 것도 있었다. 굳이 ‘소비뇽 블랑’이라 쓴 건 ‘화이트 와인’으로 바뀌어 실렸다. 처음 합의-이건 정말 그렇게 말할 수 있는-해서 ‘음식평론가’로 나갔던 ‘바이라인’은 어느새 ‘음식 칼럼니스트’로 바뀌어 있었다. 어느 매체라도 난, ‘그러므로 꼭 써야만 한다’라고 생각을 못한다. 그래봐야 쓸 수 없는 글은 못 쓰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안해도 되는 일, 남들도 할 수 있는 일은 할 필요가 없다.
결론. 나는 마카다미아가 땅콩과 호환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비약을 거쳐 이 사건은 ‘땅콩회항’으로 통한다. 심지어 ‘땅콩리턴’이라 쓰는 곳도 있다. 마카다미아가 안된다면, 심지어 ‘스낵’이라고도 안 쓴다면 ‘회항’이 ‘리턴’이 될 수 있는지조차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난 이 모든 과정이 억지고, 논리의 비약이 심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통한다. 그래서 생각해본 것이다. 땅콩과 마카다미아를 비교하고, 그 위에 내 일천한 기고의 경험을 끼얹어 버무렸다. 결론이 나왔다. 매체에게 사안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경향, 또는 습관이 있는 것은 아닌가. 모든 분야에서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음식에서는 그런 것이 아닌가. 그래서 거의 모든 이야기가 어렵고, 그저 음식과 따뜻한 마음, 제철 풍류 같은 것만 계속해서 유통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물론 구실은 있다. 독자의 이해다. 진짜 짧은 연재 기간 동안 정말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몰랐던 현실의 일부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몰랐기 때문에 앞으로도 몰라야만 하는걸까? 지금껏 이해했던 수준으로 앞으로도 쭉 똑같이 이해해야 한다면, 그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그래서 마카다미아가 땅콩으로 납작해지고, 사람들이 정말 문제의 원인이 땅콩이라 믿는다면 그건 대체 누구에게 도움이 될까? ‘이해를 돕는다’는 말이 알 권리를 침해하는 결과를 낳는 건 아닌가 생각해봐야 한다. 주는 것 가운데 필요한 것을 능동적으로 찾는 게 아니라, 주는 대로 찾던 것이라 믿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이것이 단순화의 필터로서, 계속해서 쉬운 것이나 답만을 찾는 우리의 현실과 관련 있으며, 계속해서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막말로 집단 지능이 떨어지고 있다고 본다. 학원을 다니고, ‘책 말하는 책’을 읽고 다 이해한 것처럼 말하는 현실의 일부인 것이다. 또한 마카다미아가 각각 땅콩과 nut으로 바뀐 사고가 똑같다는 말을 한 이들에게도 묻고 싶다. 대체 언제부터 매체에 그렇게 믿음을 품었느냐고. 만약 그렇지 않은데 이 사안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근거는 무엇이냐고.
UPDATE(01/18/15): 작년 12월 29일자 한겨레21에 실린 글. “평소 땅콩을 즐기지도 않았을 일등석 승객이 땅콩을 문제 삼아 비행기를 돌렸다.” 이런 글을 쓰면서 사실 확인을 하지 않은 저자/데스크 모두 문제지만, 그 이면엔 이 사건의 원인이 정말로 땅콩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는 걸 보여준다. 내가 이 글에서 지적한 바로 그 문제의 정확한 예. 네, 사람들이 모두 마카다미아인 걸 아는데 헤드라인 잘 뽑으려고 땅콩이라고 그랬다는 것이죠?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정확함, 디테일에 참 무관심한 나라입니다. 요즘은 알면서도 그러는 경우도 늘고 있어서 더 한심하죠.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무심하게 지나쳤던 기사들인데 생각해보니 참 이상하네요. 뭐든지 단순하게 우겨버리는 매체들과 그 단순함을 원하는 사람들.. 매체의 문제일까요 받아들이는 사람의 문제일까요? 일단 저부터가 신경쓴 적 없는 문제네요..
트윗 하신 것도 보고 쓰신 글도 봤지만, 이번 건은 아전인수 격으로 끼워맞추고 있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언론 매체 및 “마카다미아가 각각 땅콩과 nut으로 바뀐 사고가 똑같다는 말을 한 이들”이 마카다미아와 땅콩은 같은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을 뿐더러, 이 사안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부분입니다. 어떤 언론도 ‘땅콩 때문에 회항했다’같은 논조를 펴고 있지 않고, 걱정하시는 것처럼 대중이 그렇게 오해하는 방향으로 가지도 않습니다. 모두가 갑질의 부조리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판국에 왜 마카다미아와 땅콩의 관계에 그렇게 집착하시는지 이해하기도 어렵고요.
땅콩회항에 동의하시지 못하는 이유를 이렇게 길게 쓰셨지만 결국
1. 마카다미아는 땅콩이랑 다르다
2. 말맛이 없다
3. 사건을 왜곡할 수 있다
4. 언론이 맨날 하는 지나친 단순화다
이거 네개인데
1. 마카다미아는 땅콩과 다릅니다. 기사도 보셨다시피 헤드라인은 땅콩이고 실제 내용은 마카다미아라고 하는 거 보시지 않았습니까? 기사에서 마카다미아는 사실 땅콩이다. 땅콩 따위를 일등석에 내놓아서 회항했다고 하나요? 그리고 실제 인정하셨다시피 이런 헤드라인은 언론에서 종종 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땅콩과 달라요. 그래서요? 누구도 같은 거라고 하지 않습니다.
2. 말맛이 있는지 없는지는 주관의 영역입니다. 왜 논리적인 근거를 가져와야 할 글에 본인의 ‘맛’을 가져오시나요? 그게 말맛이 없다면 대중이 싫어할테고, 말맛이 있다면 계속 쓰일 겁니다. 계속 쓰이는 거 보니 말맛이 있는 모양입니다. 네, 늘 하시던 말처럼 기본기란 것이 있고, 그 위에 주관이 있어야겠죠. 그래서 땅콩을 써서는 안되는 것이겠죠. 아니요, 언론에서 헤드라인은 자주 그렇게 뽑는 편이라고 본인도 인정하시지 않았습니까.
3. 말씀드렸다시피, 어떤 언론도 땅콩 따위를 내놔서 회항시켰다고 하지 않습니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곡하고 있나요? 아니면 본인이 왜곡했다고 하실 셈인가요? 지금까지 나온 기사들을 읽어보셨다면 그런 왜곡을 충분히 수정하실 수 있지 않았나요? 또, 제시하신 다른 대안인 스낵은 사건을 왜곡하지 않나요? 아니 마카다미아같은 고급 재료를 ‘스낵’이라고 하다니요. 무지한 대중은 그냥 과자 부스러기라고 왜곡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4. 해당 건이 언론의 과도한 단순화인가요? 단순화는 소비뇽 블랑을 화이트 와인으로 했을때 단순화입니다. 칼럼 쓰시다 당하신 일은 지극히 분노할만한 단순화죠. 그런데 마카다미아를 땅콩으로 어떻게 단순화할 수 있죠? 말씀하셨다시피 마카다미아는 땅콩이 아니지 않습니까? 언론 기사에서 마카다미아는 땅콩의 일종이다. 땅콩 따위를 내놓아 부사장이 분노했다 하던가요? 이건 그냥 헤드라인을 임팩트 있게 뽑아보자고 한 왜곡에 가깝지 않나요? 왜 전혀 다른 사안을 두고 교묘하게 같은 사안인 것 마냥 하나로 뭉쳐서 근거에 보태시죠?
다루시는 음식에 관련된 내용에 왜곡이 일어나 기분이 언짢으신 건 충분히 이해할만한 일입니다. 그냥 마카다미아가 땅콩 취급 받는 것 같아 기분 나쁘다고 하시면 될 일입니다. 말도 안되는 논리를 가지고 오실 일이 아니라요. 누가 기분 나쁘다고 하는데 뭐라고 하나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논리의 비약과 왜곡을 가지고 마카다미아와 땅콩의 비호환을 설명하시는 저의는 도대체 뭡니까. 등신같은 언론, 잘난 나?
의견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너의 걱정과는 달리 마카다미아를 땅콩이라 생각하는 이는 없으며, 언론에서도 그저 헤드라인 좋게 뽑으려고 한 것’이라는 말씀인가요? 알겠습니다. 참고하겠습니다. 마카다미아를 땅콩으로 납작하게 여기지 않는 세상, 제가 꿈꾸는 세상입니다. 저도 이제 더 행복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다만 그 차이를 알던 모르던, 마카다미아가 헤드라인만을 뽑기 위해 땅콩이 되는 사고의 흐름을 도저히 이해는 못하겠습니다.
다만,
1. ‘모두가 갑질의 부조리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판국에 왜 마카다미아와 땅콩의 관계에 그렇게 집착’하느냐고 하시는데, 제가 언제 그 문제에 문제 의식을 못 느낀다고 했습니까? 아니면 제가 마카마디아와 땅콩의 관계에 “집착(죄송합니다, 안 했습니다. 집착하면 제가 마카다미아를 껴안고 눈물이라도 흘려야지요. ‘세상에 어디 너를 땅콩이라고ㅠㅠ’ 하면서요)”하면 안되는 이유가 있는지요. “국민정서”에 어긋나기라도 한답니까, 모두가 중요한 갑질의 부조리함에 초점을 맞추는 이 판국에요?
2. 저의가 뭐냐고 물으시는데, 그에 대해서는 글에서 이미 언급을 했습니다. ‘등신 같은 언론, 잘난 나’라니요. 언론이 “등신” 같다고 하지도 않았고, 저 잘났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안했습니다. 글의 요약 부탁드린 적 없습니다. 그거야 말로 “아전인수” 아닐런지요.
재미있는 답변이네요. 예상한 답변이기도 했고.
‘저의’는 보통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생각, 의견 따위를 지칭하는 단어죠. 글에 언급을 하셨으면 그건 저의가 아닙니다. 그러니 언급하지 않는 ‘저의’가 뭐냐, 이런 거 아니냐 하는 질문이 가능한 거고요. 당연히 ‘등신’같다는 이야기도 안 했고, 잘났다는 이야기도 안 하셨죠. 그러니 ‘저의’ 아닙니까.
끝까지 아니라고 하셔도 별 상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저의’겠죠.
앞으로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땅콩회항과 마카다미아넛회항 어떤 헤드라인이 더 귀에 잘 들어올까요…? 비싼 마카다미아넛을 모르는 사람도 참 많을테지요..? 아직 한국에서 보편화된 스넥이 아니기에 보편적 이해를 돕기위한 헤드라인 선택은 개인적으로 적절했다고 봅니다….. 물론 두 스넥은 다르지요 하지만 기사의 본질은 같다는게 더 중요하지 않나요..? 개인적으로 언론의 역활은 사실을 널리 알리것 이라고 생각하는데 …..생소한 헤드라인보다는 누구나 다 알고있는, 이해가 쉬운 헤드라인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은 쉬운 이해를 돕는글 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본 관점에서 헤드라인은 다르나 내용안에 정확한 사실을 기제 했고 그로인하여 마카다미아넛을 모르던 사람들까지도 호기심에 기사를 통하여 정확한 정보를 전달 받아고 또한 마카다미아넛이란 스넥도 알게 됬다면 개인적으로 기자의 역활을 훌륭히 수행 했다고 생각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