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의 저녁(8월 네째주)

P1320824

와인에 대한 허무주의를 극복, 아니 (애써) 외면하고 다시 챙겨 마시기 시작한지 좀 되었다. 매주 토요일마다 화이트, 레드 각 한 병씩 마시면 1년에 100병, 그만하면 사람이 죽거나 알콜 중독이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학습하기에 충분한 양이라고 생각한다(참고로 부정기적이며 뜸한 사람 만나기-바 놀러가기를 빼고는 주중에, 특히 집에서 절대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원칙을 꾸준히 지키고 있다. 작년 ‘외식의 품격’을 쓰며 새벽에 술을 마신 뒤 나빠진 건강이 원칙을 세우고 지키는 데 큰 몫을 했다). 하여간 이를 실행에 옮긴지 꽤 오래 되었는데도 글을 쓰지 않은 건, 무엇보다 밤에 찍은 사진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제나 노력은 중요하지만 의식적인 노력은 되려 나쁜 결과를 낳는다고 생각하는지라 그 칙칙한 사진을 더 보기 좋게 만드는 노력이 즐거움을 망치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사진이 그래도 사진처럼 나와 지난 토요일의 저녁을 정리해 올린다.

1. 알리고테와 노각 샐러드

photo 2 (3)

‘여름이 가기 전에 알리고테를 한 번 마셔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미 철이 지나버린 생각이다. 신맛 두드러지는 화이트를 좋아하는 나에게조차 알리고테는 부담스러울 수가 있다. 따라서 아주 쨍쨍하게 더울때 마시는 게 가장 좋다. 2년 전, 어쩌다 아 에 페 드 빌레인의 부즈롱 알리고테를 몇 병 들여다 마시고는 잊고 있었는데 하필 여름의 끝에서 생각이 났다. 4만원 짜리를 반 값에 사왔다. 이 정도가 되어야 이 부푼 가격대의 현실에서 모두가 좋아하는 “가격 대 성능비”의 균형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

곁들여 먹을 식재료로 노각을 생각한 건 우연이었다. 누군가 트위터에서 노각의 질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떠올랐다. 어머니의 노각 무침을 굉장히 좋아했는데, 내 부엌을 꾸리기 시작한 이후로는 아예 잊고 있었다. 공감한 트윗의 정서도 그러했지만 노각은 어딘가 모르게 처량하다. 특유의 파릇함 또는 풋내를 완전히 잃어버린, 그 방치된 노후가 철저하게 그의 책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는 요절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으니 스스로의 늙음에 한탄할 수 밖에 없다. 하여간, 질감은 그렇지만 남아 있는 풋내의 흔적이 알리고테의 쌉쌀함(와인 매장의 직원은 이걸 ‘쓴맛’이라고 표현했는데 그럼 판매에 도움이 될까? 그냥 씁쓸/쌉쌀함이 적절할듯. 와인 홍보를 위해 미묘하고 섬세한 우리말 어휘를 계발하려는 시도는 왜 아무도 하지 않나)과 잘 어울릴 거라 생각했다. 거기에서 출발해 오이와 딜의 조합, 얇고 드라이한 와인과 페타 치즈의 조합 등등을 이리저리 짜맞추니 결국 수박-페타치즈-민트 샐러드의 묘한 응용이 되어 버렸다. 질감의 조화로 따지자면 프로슈토가 나을 것 같은데 마음에 드는 게 없어 바삭하게 구운 베이컨으로 대체하고 그 기름과 레몬즙의 비니그렛으로 버무렸다. 핵심은 수분 걷어내기. 한국식으로 뭉쳐서 짜면 뭉개지므로, 소금에 절이고 물로 헹군 다음 쟁반 등에 종이 행주를 깔고 그 위에 한 겹으로 올리고 다시 종이 행주를 덮어 누르는 게 가장 좋다.

2. 보졸레 빌라주와 고추잡채

photo 1 (3)

아직도 보졸레 누보가 유행인가? 시간이 부가가치와 함께 사연을 덧씌워주는 와인의 통념을 역 이용해서 팔아먹는 건, 온전히 마케팅 전략으로는 칭찬해줄 수 있지만 내 앞에 놓인 술의 맛으로는 불가능하다. 그 역발상을 마시는 것이지, 술을 마시는 것이라 생각히 안 들기 때문이다. 지난 해 오리곤 윌라멧 밸리의 버그스트롬 양조장에서 15달런가 내고 병당 60, 100 달러쯤 한다는 피노 누아를 마셨을 때도, 생산지에서 포도밭을 바라보며 마시는 것 자체는 의미 있지만 술이 그야말로 너무 어리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하여간, 너무나도 뻔한 소리지만 보졸레에는 보졸레 누보 말고도 다른 와인이 얼마든지 있다. 한 병 마실 때마다 이런 걸 일일이 찾아보기가 버거울 지경인데, 하여간 대부분이 보졸레 누보로 나가는 Beaujolais AOC가 있고 그 윗 등급의 Beaujolais Village AOC-보졸레 누보와 차별을 두기 위함인지 아예 ‘보졸레’라는 단어를 빼고 소지역의 명칭만 딱지에 표기하는 Cru Beaujolais가 있다. 대개 가메이 누아(Gamay Noir)로 빚는데, 주로 두툼하지 않고 탄닌이나 신맛도 강하지 않아 잘 넘어가지만 크뤼 보졸레까지 올라가면 지역에 따라 중간 이상으로 두툼한 것들도 있어 대개 3년 안에 마시는 보졸레나 보졸레 빌라주와 달리 10년 숙성에도 버틴다고 한다. 그래서 ‘같은 브루고뉴라면 과대 평가된 피노 누아 바탕 보다 차라리 이쪽을 사서 두었다가 마셔라’라는 말도 있다고. 피노 누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라 정서적으로는 공감하지만 경제적으로는 공감할 수 없어 실행에 옮길 수는 없다.

P1320829

몇 달 전, 그렇게 10년 숙성도 가능하다는 크뤼 보졸레의 물랭아방(Moulin-à-Vent, 루이 자도 4-5만원대?)을 마셔봤는데 어떤 특성을 놓고 그런 말을 하는지는 이해했지만 딱히 좋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 마셔본 건 그보다 한 등급 아래인 보졸레 빌라주(26,000원). 5년쯤 전에 아무 생각 없이 권해주는 대로 한 병 가지고 있던, 역시 크뤼 보졸레의 10개 지역 가운데 하나(이를 놓고 ‘beaujolais’라는 단어의 철자 열 개와 병치시켜 기억하면 쉽다고…)인 브루이(Brouilly)와 잘 어울렸다는 기억이 나 고추잡채를 만들었다. 이미 화이트를 마셔 적당히 술이 오른 상태라 칼질이 엉망이다(아침에 일어나니 기억이 거의 없었음). 고추잡채는 꽃빵과 먹어야 완성된다는 생각에 부랴부랴 만들었는데, 쪄먹는 빵의 반죽에 통밀 50%를 섞는 것이 좋은 선택인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와인은 중간 정도의 두툼함에 가운데는 다소 빈 듯 짜임새가 두드러지는 편은 아니며(이 가격에 뭔들 안 그렇겠느냐만) 신맛은 없으므로 너무 진한 고기 보다 중간 정도, 즉 돼지나 닭(껍질은 잘 구워야)과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다. 음식 없이 마실 수 있는 수준의 레드라는 결론.

P1320834

한편 디저트는 아몬드 케이크. 푸드 프로세서를 쓰면 믹서를 썼을 때보다 덜 부풀어야 하고, 분명 지난 번엔 그랬는데 이상하게도 너무 많이 부풀었다. 수평으로 반을 갈라 가운데에 살구잼을 발랐다. 이런 것이 소위 말하는 “가정식” 디저트. 생과일 얹은 이상한 타르트 말고.

P1320839

와인과 전혀 상관은 없지만 부지런을 떨어 김치도 담갔다는 소식. 무를 먹을 계절은 아니지만 열무-얼갈이도 딱히 다를 건 없어 그냥 사왔다. 싱싱하지만 단단하고 맵다.

4 Responses

  1. Alix says:

    저도 롯데백화점 본점가면 와인코너를 지나는데 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너무 공격적으로(!!) 몰아붙여서 도무지 뭘 볼 수가 없어요. 한번도 못샀습니다.
    수수료때문이겠지만 도리어 손님을 쫒네요…

    저는 와인에 대해선 지식도 거의 없고 막입이라^가끔 홈플러스에서 화이트와인 사는 정도인데요,전에 아셈타워있을때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에서 와인을 종종 왕창 세일해서 그 기회에 사곤 했습니다. 잘 모르니 신대륙쪽으로 할인율 크고 라벨 맘에드는 적당한 것 샀는데 그럭저럭(제 입엔) 괜찮았던 것 같아요.

    각설하고…외식의 품격 4쇄 축하드립니다! 증보를 거듭하기 바라고 후속편도 빨리 보면 좋겠어요.
    번역하신 The man who ate everything은 제가 정말 아끼는 책입니다.좋은 번역본도 ‘꾸준히’ 내주세요^^

    • bluexmas says:

      대개 다른 백화점은 본다고 그러면 놓아두는데 롯데는 좀 끈질깁니다. 홈플러스에서 테스코 수입 가비 등등을 마셔보았는데 한 번 정도 마셔볼만하다는 생각이에요. 라인업으로는 이마트가 더 낫습니다. 백화점은 현대가 가장 좋다는 생각이고 무역센터는 리뉴얼한 후 구색 꽤 좋은데 멀어서 자주는 못 가고요, 갤러리아는 또 좀 다르더라고요. 신대륙쪽 와인은 적당한 가격대에서 일정 수준의 만족도를 주는 쪽으로는 좋다는 생각입니다.

      후속편은 10월부터 작업 예정이고요, 그 전까지 번역을 쭉 합니다. 모든 것을 먹어본 남자는 사실 개정판을 내고 싶은데 출판사와 연락이 안 되네요.

  2. ndxz_studio says:

    궁금한데 어디서 여쭈어 봐야 할지 몰라서…. 그런데 정말 궁금하기는 해서.. 죄송함을 무릅쓰고 여기에 씁니다. 글을 읽다보면 게시물 위 중앙에 “미분류 05/11/2004” 등으로 표기되어 있어요. 댓글로 보아서는 2010년에 쓰신 글인데, 글 위쪽의 날짜가 저렇게 돼 있으니 간혹 이게 언제적 일인가 하면서 가끔 혼란스러워요. 왜 날짜태그가 저렇게 되는 것인가요? ^^

    • bluexmas says:

      아… 그건 이글루스에서 백업이 안 되는 걸 퍼온터라 날짜가 고정되어 있는 겁니다. 제가 천천히 수동으로 고치고 있어요 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