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저녁

그렇지만 회사에서 저녁을 먹고 싶은 마음은 눈꼽만틈도 없었다. 오늘 저녁엔 무조건 어제 산 홍합.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혼자 속삭였다. 그때가 여덟시였다. 야근은 예정보다도 훨씬 길어졌다.

긴 하루였다. 여섯시 반에 일어나서 차 엔진 오일을 갈러 가는데 도중에 경찰에게 붙잡혔다. 왜에? 나는 이유도 몰랐는데 알고 보니 왼쪽 헤드라이트가 나갔다고 했다. 이 동네 경찰들은 나 같은 동양인들에게 굉장히 박하다. 나, 지금 정비하러 가는 길이니까 그것도 고칠께… 왼쪽은 5불인가를 주고 전구를 사다가 내가 직접 갈았는데, 다시 또 부속품 사러 가기도 귀찮고 해서 같이 갈아달라고 맡겼더니 거의 30불 가까이 들었다, 젠장. 그러나 비가 하루 종일 내렸으니 그냥 안전을 위해서 투자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침엔 회사 직원 전체가 모여서 요즘의 경제사정에 회사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나, 에 관련된 얘기를 사장님으로부터 들었는데 이건 지난 6월에 벌어진 연례행사인 주주총회(우리 회사는 소위 말하는 ‘우리사주’ 회사다. 3년 넘으면 회사 주식이 나오는데 어떻게 돌아가는지 나는 잘 모르지만 나에게도 떡고물이…)의 업데이트 같은 것으로, 그때 벌써 우리 회사는 작년의 영업실적과 경제사정에 맞춰 이런저런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연봉 동결과 같은 것들. 삼십분 조금 넘게 이런 저런 얘기를 들었는데 결론인 즉슨 경제가 워낙 나쁘니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연말을 향해가는 이 시점에서 우리 회사의 올해 실적은 무척 좋고, 그래서 ‘웬만하면’ 고용은 계속해서 이뤄질 것이며 돈을 빌려서 사업체를 유치하는 모델을 쓰지 않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서의 염려는 없을 것이라고… 그리고 나머지는 여기에 올리기 뭐한 얘기들. 그래서 조금 안심이 되었다. 단순 월급쟁이가 회사 잘 돌아간다는 얘기만큼 듣기 좋은 얘기가 더 있을까. 앞으로 살다보면 이런 경제에 관련된 위기는 계속해서 닥칠게 분명하니까, 어떻게든 이런 상황에서도 살아남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은 어찌 보면 긴 안목에서의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뻔한 생각도 들었다. 나는 이번 달 들어 앞으로 3년 더 유효한 노동허가를 새로 받았고, 그래서 그 3년 동안 해야 될 이런저런 일들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내년이면 서른 다섯, 사십대가 그리 멀지도 않은 이 시점에서 앞으로 여기에서 머물 수 있는 3년 동안 뭘 얼마나 할 수 있는지에 따라 앞으로의 삶이 상당 부분 결정될거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걱정도 많고 원하는 만큼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던게 현실이지만 그래도 이제는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었다.

어쨌든 조금 일찍 퇴근하려던 계획은 막판에 차질이 생겨 늦어졌다. 보통 납품을 위해 도면을 그리면 그 도면을 정해진 축척으로 가공해 Sheet에 담게 되는데, 나는 나에게 주어진 다른 일들을 점심 시간 전에 끝내고 오후엔 다른 팀의 sheet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건 뭐 지금까지 백만번도 더 했던 일이니까 가지고 있는 요령으로 가능한 빨리 끝내고 퇴근하려는데, 처음 시작할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단위며 들어가는 글자들의 크기, 이런 것들이 회사의 표준과 다르게 설정되어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거기에서 더 손을 대기는 정말 귀찮은 일이지만, 그걸 잘못된 상태로 놓아두었을때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니 귀찮아도 다 고치고 가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그걸 놓아두고 퇴근하면 마음도 편치 않을게 뻔하고… 그래서 한 시간을 더 일해서 표준대로 바로 잡아놓고 퇴근하니 여덟시쯤, 비는 계속해서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고 나는 체육관에 들러 운동을 하고, 집에도 뭔가 마실게 있었지만 그냥 이런 날은 나에게 작은 상이라도 주고 싶어서 가게에 들러 안 마셔본 소비뇽 블랑을 추천받아 한 병 사 들고 왔다. 집에 오니까 열 시 반, 저녁을 먹기엔 너무 늦고 또 피곤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저녁은 저녁답게 먹이고 싶어서 얼른 밥을 데워서 먹고 홍합을 끓였다. 역시나 추천 받은 포도주는 맛있었지만 홍합은 생각보다 별로였고 나는 낮에 생각해놓았던 뭔가와 이 글을 쓰려고 창을 두 개 열어놓고 있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by bluexmas | 2008/10/26 04:28 | Life | 트랙백 | 덧글(4)

Commented at 2008/10/26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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