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의 이해(13) – 파인 다이닝과 격의 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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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토랑 예약을 위해 전화를 돌린다. 아뿔싸, 녹음메시지가 나온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오늘도 고객님의 맛있고 건강한 미식 경험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저희 000레스토랑에 전화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최고급의 재료와 정상급의 솜씨로…’ 아아. 직원이 전화를 받기까지의 찰나에 나는 망설인다. 이런 싸구려 메시지라니, 안 가봐도 수준을 알 것 같기 때문이다.

열이라면 일곱, 여덟 군데의 레스토랑에서 이런 식의 안내 인사를 만난다. 정말 가기도 전에 난감해진다. 격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인사를 넣을 필요도 없지만, 굳이 넣겠다면 고민해서 찾고 마련해야 한다. 남들 다 쓰는 걸 골라봐야 똑같은 수준을 지향한다는 선입견만 조장한다. 실제로 그냥 표정 없는 신호음만 가는 두세 군데의 음식이 훨씬 나았다. 레스토랑 선택에 참고해도 좋다.

그래도 인사말은 양반이다. 메시지는 점입가경이다. ‘저희000에서제철재료로최선의식탁을준비하였사오니지금예약전화주시면…’ 장난을 치려는 게 아니다. 실제로 띄어쓰기조차 무시한 문자가 날아든다. 제철 재료? 이미 문자에서 쉰내가 풀풀 풍긴다. 심지어 타이밍조차 최악인 경우가 많다. 밤 열한 시에도 받아봤다. 술 한 잔으로 일터의 스트레스를 풀거나, 그럴 기력도 없어 집에서 쉴 시간대다. 이래저래 방해만 될뿐더러 다음 날이면 기억도 못할 게 뻔하다. 전화 걸어 명단에서 지워달라고 짜증이나 안내면 다행이다.

고민의 부재는 파인 다이닝 전반에 걸친 문제지만, 음식 이외의 부분에서 오히려 더 뼈저리다. 괜찮은 음식의 발목을 물귀신처럼 끌어내릴 수 있다. 뜻을 다시 한 번 새겨보자. ‘파인(fine)’ 다이닝이다. 영영사전에서는 ‘superior in kind, quality, or appearance’라 정의한다. 감이 오지 않는가? 또한 ‘Excellent’와도 동의어다. 결국 빼어나고 탁월한 식사다. 게다가 파인 다이닝은 총체적인 경험이다. 음식을 중심으로 모든 요소의 수준이 어느 정도 맞아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음식이 후하게 쳐 70점이라면 나머지는 50점, 우리가 맛보는 경험은 결국 평균 60점짜리다.

‘우리의 문화가 아니므로’라는 변명을 할 수는 있다. 감안할 수 있지만 사실 궁색하다. 우리의 의식주 가운데 ‘식’의 절반 정도를 빼놓은 나머지는 이미 서구화 된지가 오래다. 해외여행 인구 또한 매년 느는 추세다. ‘트렌드’니 ‘옵션’이니 하는 외국어 또한 우리말만큼 자연스레 쓴다. 낯설음이나 경험부족이 원인은 아니라는 의미다. 역시 문제는 인식부족이다. 음식도 갈 길이 멀지만 그 외의 요소 또한 똑같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없다. 콘셉트는 레스토랑의 이름이나 음식, 디자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뿌리를 굳건히 내리고 모든 디테일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졸부 근성에도 혐의가 간다. 시간을 들여 쌓은 취향이 없으니 ‘고급 음식=고급 재료’라는 공식을 레스토랑의 기획에도 덮어놓고 적용한다. 막말로 ‘돈지랄’을 하는 것이다. 비싼 마감재를 바르고 역시 비싼 식기만 갖추면 저절로 고급이 될 거라 믿는다. 그럴 수 없다. 파인 다이닝은 라이프스타일을 파는 사업이다. 파는 사람의 몸에 배인 삶이나 취향이 아니라면 어설프고, 따라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예는 널렸다. 한남동의 “캐주얼” 레스토랑 세컨드 키친에서는 식탁에 종이를 깔아주는데, 찍힌 로고가 금박이다. 왜 하필? 누군가는 캐주얼하지 못한 가격을 지적하지만 오히려 그렇게 자질구레한 게 더 걸린다. 롯데 호텔에서 미슐랭 별 셋의 피에르 가니에르 이름이 붙은  케이크를 샀다. 한 여름이었는데 크기에 맞는 얼음팩이 없다며 B5용지만한 걸 내줬다. 가히 국내 최고가인 케이크는 고정이 안 돼 덜렁덜렁 흔들린다. 총수가 재일교포인 대기업의 사업체에서 이웃 나라의 케이크 문화는 배울 생각이 없는지 의아했다. 그 절반 가격의 케이크를 위해서도 크기에 맞는 얼음팩을 갖추며, 상자는 지지용 칸막이를 갖춰 케이크가 움직이는 걸 막아준다. 바닥에도 테이프를 붙여 안전장치를 한 겹 덧댄다. 케이크만 갖춰서 되는 일이 아니니, 준비가 안 되었다면 팔지도 말아야 한다. 한편 이태원의 “모던 한식” 레스토랑 웨이터들은 ‘레시바’를 꽂고 돌아다닌다. 나이트클럽도 아닌데 꼭 이래야 되나 싶다. ‘3번 손님 식사 다 드셨고…’ 중얼거림이 다 들려 거슬린다.

이렇게 떨어지는 파인 다이닝의 격은 인터넷 세상에서 바닥을 친다. SNS 시대의 부작용이 두드러진다. 일단 제대로 된 홈페이지를 갖춘 레스토랑이 거의 없다. 가볼까 싶어 검색하면 실속 없는 개인 블로그부터 나온다. 위치나 메뉴 등, 정보를 소위 말하는 파워블로거들이 안내해주고 앉아있다. 가뭄에 콩 나듯 레스토랑 블로그가 걸리지만 디자인도 형식도 없이 셰프가 신변잡기나 늘어놓는 수준이다. 블로그가, 자신의 글이 레스토랑을 공식적으로 대표한다는 의식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손님이 알 필요 없는 인간적인 면모를 트위터에 드러내는 것도 유행이다. 그래도 손꼽히게 좋은 음식을 내는 프렌치 셰프의 계정은 대나무숲이다. 직원이며 손님에 대한 불평이 끊이지 않는다. 예약을 어긴 단체의 실명조차 거론한다. 가고 싶은 생각이 가신다. 이런 이야기에 ‘너 같은 손님 오지 않아도 좋다’는 반응을 트위터에 남길지 모르겠다. 두 가지만 덧붙이겠다. 파인 다이닝은 서비스업이다. 영업이며 연기, ‘코스프레’가 필요하다. 인간적인 면모는 아는 사람들과 술자리에서나 보여주면 충분하다. 납득하기 어렵다면 자동차 세일즈맨에게 물어보기를 권한다.

 

4 Responses

  1. 카페 뎀셀브즈 사태나 일전에 언급하셨던 트위터로 실명거론하며 ㅈㄹ한 일들을 보면서 ‘서비스업의 본질’을 밥 말아먹은 가게들이 의외로 꽤 되는구나 하는 걸 많이 느낍니다. 🙁

    • bluexmas says:

      네 생각보다 많죠. 이게 연기임을 생각 못하는 곳도 많고요, 아니면 연기를 너무 못한다거나…

  2. sfgirl says:

    다시 오니까 더 깔끔해져 있네요. 오픈 축하드립니다.

    논지에 공감합니다. 손님 뒷 얘기를 하는 서비스 제공자(레스토랑뿐 아니라 서비스업 전반)는 불편해요. 더구나 SNS로 뒷얘기라니…

    • bluexmas says:

      네, 감사합니다. 뭐 간 쓸개 다 내줘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런 상황에 굳이 나서서 대처하지 않는 것도 의미가 있다는 얘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