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자가 본

처음 포스터를 보았을때 사실 보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또 그렇고 그런 영화라고 생각했던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까놓고 얘기해보자, 우리가 보는 드라마 또는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의 직업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의학드라마(또는 영화)면 의사가 연애하고, 법조계 드라마면 판검사변호사들이 연애할 것이다. 나는 직접 음식을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재작년의 <파스타>에서 묘사한 셰프며 이야기들이 그 바닥을 제대로 묘사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직업은 그저 ‘돋게’ 묘사되어 연애를 더 돋게 꾸며주는 장치 역할을 할 뿐이다. 일본 드라마 <밤비노> 정도라면 진짜 음식드라마라고 할 수 있을텐데 그러면 사람들은 보지 않겠지? 제목부터 <건축학 개론>이라니 건축 전공자로서는 호기심을 안 가질 수 없었지만 보나마나 그런 영화일 것이라는 선입견에 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감독이 건축 전공자라는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 주 1)

사실 나는 이 영화의 설정 그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이 없다. 공대의 타과로 입학했다가 2학년으로 올라가서 전과를 했기 때문이다. <건축학 개론>이라면 전공 필수일 것이 뻔하므로 이후에 들었을법도 한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긴 근 20년 전의 일이니 기억이 잘 안 날 수도 있다. 1학년 전공 필수를 군대 갔다온 다음 99학번과 같이 들었는데, 그때는 1학년 1학기의 <건축제도>가 전공자를 위한 개론 역할도 같이해서 나는 그걸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쨌든 감독이 전공자라는 이야기를 듣고 ‘아 그렇다면 이 사람이 묘사하는 직업 세계는 좀 덜 돋을까?’라는 궁금함에 개봉 첫 회를 찾아서 보았는데, 그 측면에서 영화는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적절한 수위에서 분위기는 물론 디테일을 조절하려고 하는 고심의 흔적을 읽을 수 있었고 따라서 굉장히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알바만 했지 졸업 후 회사를 다녀본 적은 없기 때문에 아주 정확한 분위기는 모른다고 하는 게 맞지만, 영화의 시작에서 소장이 모형을 보고는 책상 위에서 자고 있던 엄태웅에게 ‘야, 너 입면 또 고쳤지?’라고 말하는 부분부터 어째 그러한 부분이 굉장히 자연스러울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고 그 예감은 영화 내내 딱히 틀린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뭐 그것도 ‘작품’ 타령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할 수 있는 건축가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짜증날 정도로 집중적인 호구조사를 하고는 ‘어떻게 사는지 알아야 집을 짓지’ 운운하는 엄태웅 또한 굉장히 자연스러워 보였다.

게다가 감독의 모교에서는 정말 그렇게 수업을 해서 그걸 반영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김의성이 연기하는 건축학 개론 담당 교수 및 얼핏얼핏 보여주는 수업 내용들 또한 손발이 오그라들락말락한 수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남녀주인공이 서로를 향한 감정을 키워나가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이를테면 사는 동네를 물어본다거나 사진을 찍으며 그 동네를 자세하게 관찰하는 과제를 주는 것 등등은 극단적으로 현실적인 측면에서라면 ‘아 그때 그런 거 다 뜬구름 잡는 거였지 오늘도 그냥 똑같은 창문 디테일 백만개 카피앤페이스트하면서 야근 ㅋㅠㅠ’라고 할 수 있지만 적당히 이상적인 측면에서는 신입생때 배워서 나쁠 것 없고 개인적으로는 필요하다고도 생각하는 측면이기도 하다.

또 모형 만들어주기는 어떠한가? 사실 나는 2학년 1년만 다니고 군대를 간지라 건축과 학생으로 연애 같은 것도 제대로 못해보기는 했지만ㅠㅠ 그때도 주변에는 그런 비슷한 모형을 만들어 비 건축 전공자인 여자친구에게 선물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대부분의 비전공자에게는 사실 모형을 만드는 것 자체만으로 신기해보이는 경우가 왕왕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뭔가 있어보이는 분위기를 자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에 등장하는 모형은 1학년의 수준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건축관련 원고를 투고하면서도 종종 했던 이야기지만 사실 건축이 삶을 반영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단순히 극적인 장치로라도 건축을 차용해서 거기에 얽힌 사람들의 삶을 풀어나가는 것은 효과적인 전략이 될 수 있다. 너무나도 전형적인 연애의 장치 같은 것들에는 솔직히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이런저런 것들을 다 걷어냈을때 그 중심에 남아있는 건축만을 놓고 본다면 ‘아, 감독이 건축을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에 뭔가 수위를 조절하려고 애썼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아주 즐겁게 보았다. 그래서 결론인즉슨, 전공자의 시각에서 보았을때 이 영화에서 자아내는 건축의 분위기는 꽤나 설득력이 있다는 것. 나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주 1: 건축을 전공한 감독이 또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학부 4학년때 지도교수는 ‘건축을 전공하면 정말 별 걸 다 한다. 내 동기도 교수하는 나부터 예식장 주인하는 녀석까지 다양’이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워낙 잡다하게 배우는 탓에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되는 부분도 있다. 최근에는 심지어 건축 전공한 출판사 편집자도 만난 적이 있다. 물론 그렇게 잡다하게 배우기 때문에 우월한 학문이라고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건축은 학교 다닐때 투자하는 돈과 시간에 비해 그 회수가 딱히 훌륭하지 않은 직종이다. 서비스면서도 물질-도면-을 제공해야 하는 속성+자동화가 안되는 측면 때문에 인력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힘들다.

본문에 넣기 뭐한, 잡다한 생각들.

1. 거듭 말하지만 나는 이 시절에 연애를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처럼 감정을 이입해서 회고하고 자시고 할 정황은 전혀 아니었다.

2. <기억의 습작>을 듣는 신입생이라면 딱 내 학번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교정에 걸린 플래카드는 96년이고 또 기타 여러가지 영화 속의 정황을 섞어서 보면 그냥 그 중간의 시점 어딘가를 살짝 모호하게 설정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3. 사실 한가인 빼고는 그 영화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연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지라(어린 시절 역할의 배우들은 아예 누군지도 몰랐고, 엄태웅은 이름이랑 얼굴만 어디에서 주워들어 그냥 아는 정도였다), 그 모든 것들이 본의 아니게 너무 신선했는데 적당히 능청스러운 엄태웅의 연기는 굉장히 좋았다. 다만 그 능청스러움이 대학교 1학년의 본인과 비교할때 너무 바탕이 없어보여서, 강산이 한 번 반 정도 변하는 시간이라고는 하지만 그 변화가 그야말로 너무 극적이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감독의 인터뷰를 찾아보니 ‘꼭 그럴 필요는 없다’고 연기자들에게 주문했다던데 엄태웅이 보여준 연기라면 그런 부분이 보일락말락하게 좀 더 남아 있도록 설정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4. 이제훈도 연기를 잘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종종 보여주는 그 멍한 표정이 먼 옛날 보았던 박신양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자꾸 들었다. 나만 그렇게 느낀 건가.

5. 한가인은 (              ), 수지는 (            )

6. 3에서 한 가지 더. 어쨌든 그 정도의 시간적 배경이었다면 현재의 엄태웅은 대략 30대 중후반의 실무 10년차 안팎, 그렇다면 아주 많은 결정권자를 거치지 않고도 어느 정도 자기 디자인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위치라고 생각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렇지 않나? 내가 다니던 미국회사에서는 그 정도 경력이라면 우리나라에서 과장급이었고 일처리에 따라 프로젝트 매니저를 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7. 아직도 건축과가 공과대학 소속인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물론 건축에 공학적인 측면도 차고 넘치지만,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부분에서는 그런 특성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 ‘공대생만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라는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나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8. 정황상 ‘레노베이션’으로 갈 것이라는 짐작을 금방했는데, 디자인의 측면에서 이야기하자면 예전의 기와지붕을 굳이 살려둘 필요가 있었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발자국이 남은 샘이나 키 잰 흔적이 남은 벽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았을까나.

9. 키스까지 하는 설정+현실이었다면 난 그냥 첫사랑을 선택했을듯. 현재의 여자친구에 딱히 큰 매력을 불어넣지 않아서 하게 되는 쓸데없는 생각이다.

10. 여학생의 비중도 은근 높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서 건축과의 과내 연애 비율은 꽤 높은 편이었다. 내가 학교 다닐때만 해도 여학생들은 대부분 건축과 내에서 해결하고 나머지 남학생들이 외부로 진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가?

 by bluexmas | 2012/03/27 02:27 | Movie | 트랙백 | 덧글(11)

 Commented by 닥슈나이더 at 2012/03/27 08:04 
뭐… 계꽈도 만만찮게 여러가지 직업이 많은지라…

은행원, 보험회사직원, 광고회사직원, 외제차 영업사원, 교수, 전산쟁이, 컨설턴트, 자동차회사,

전자회사, 보일러회사, 연구원, 변리사

이건 제 친구들의 직종이고…. 또 더 있겠죠.

 Commented by bluexmas at 2012/04/03 00:53
네 뭐 사실 전공이 큰 의미가 있어야 할 필요도 없지요.

 Commented by nargal at 2012/03/27 10:13 
건축 전공한 육군 대령님과,기계공학과 출신 신부님,전자과 나온 중국집 사장님,화학공학과를 나오셨다던 밥차 아주머니…

언젠가 애정남이던가 거기서 “학과는 중요하지 않다,나는 패션디자인과 나오고도 개그맨 하고있다”는 식으로 개그 치던게 있었는데 그거 보고 웃질 못하겠더군요;

 Commented by SiroTan。◕‿‿◕。 at 2012/03/27 13:17
그러게요 현실은 학과가 아니라 학교가 중요? 한거겠죠 이 불편한 진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12/04/03 00:54
화학공학과 나온 밥차 아주머니 만나뵙고 싶습니다… 어디에 그런 분이 계시나요?

 Commented by 당고 at 2012/03/27 13:13 
드물게 보는 bluexmas님의 영화평! 내일 보려고 생각 중입니다 ㅋ

 Commented by bluexmas at 2012/04/03 00:54
평이라기 보다 그냥 뭐 감상문이죠. 늘 그렇듯 영화에는 문외한 크크.

 Commented by 모나카 at 2012/03/27 13:25 
영화 보고 돌아오면서 대충 1,2학번 위라고 생각했는데 친구가 폰으로 검색하더니 전람회 1집은 94년에 나왔다더군요. 15년이라는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 96년이 적힌 현수막도 걸린 것 같은데, 어디 보다보니까 원래 계획보다 영화가 밀렸다고 하더라구요. 그럼 원래 감독은 전람회 1집 나온 94,95학번 얘기로 만들려고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쩐지 묘하게 같으면서도 좀 다르더라니… 특히 수지의 패션은 당시보다 올드하죠. 그 땐 힙합바지와 맨투맨 티셔츠, 그리고 이스트백이었는데 말이죠. ^^

 Commented by bluexmas at 2012/04/03 00:54
네 이스트백^^ 시간적 배경이 좀 애매하지면 꼭 맞을 필요도 없지요 뭐.

 Commented by 미안하다사망한다 at 2012/03/31 15:11 
저도 건축학을 전공해서 건축관련 업에서 밥벌어먹고 삽니다만…

정말 건축 전공해서 다른거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제 동기 중 하나는 재무’설계’를 한다더군요…ㅎ

GQ편집장인 이충걸 씨도 건축 전공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12/04/03 00:56
재무설계도 좋겠네요..^^ 설계회사 다니시면 요즘 분위기는 어떤지 궁금하네요. 그 분 건축과 출신이라는 건 진즉 알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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