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책 종결자, Modernist Cuisine

쌈짓돈을 두 손에 꼭 쥐고, 재판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는 바로 질렀다. 단 1초도 망설이지 않았다. 책값 462달러에 운송료 18달러, 단 사흘만에 책이 바다를 건너 내 손에 떨어졌다.

모든 유행어를 싫어하지만 진짜 ‘종결자’ 같은 유행어는 종결시켜버려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싫어한다. 그러나 이 책에는 정말 종결자라는 호칭을 붙이지 않을 수가 없다.

뒤져보니 해외단신 같은 몇 줄짜리 기사로 소개된 적도 있으니 내가 안 해도 될 이야기는 하지 말고 그냥 간단히 이 책이 뭐해먹는 물건인가 짚어보기로 하자. 얼마 전 해롤드 맥기의 <On Food & Cooking>이 번역 출간되었다. 1994년에 초판이 나오고 아마존에서 30불 이하로 살 수 있는 책이 고등학교 과학 교과서 수준으로 번역되어 나왔는데도 꽤 호들갑들 떨어대는 걸 보았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났는데 그 책 읽고 뭐 좀 나아진 것들 있나? 아직도 지져서 육즙 새는 거 막아준다는 타령은 여전히들 하고 있더만.

어쨌든, 기본적으로 이 책은 해롤드 맥기의 그것과 같은 책들이 가지고 있는 조리의 과학적 이해를 집대성해서 실험을 통해 결과를 검증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물론 조리의 역사부터 재료의 이해, 조리 기구와 기술, 응용가능한 조리법 등등을 총망라하고 있다. 아래의 사진을 보면 제목만으로 대강 이해가 될 것이다. 총 다섯 권이고 여섯 번째 책은 파라메트릭 레시피가 든 매뉴얼, 그리고 맨 위에 얹은 건 딸려 오는 두께 약 0.7센티미터의 아크릴 전용 책꽂이다.

미국은 물론, 특히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들을만한 비난이랄까 뭐 그런 생각해보니 “이거 다 분자요리 레시피 아냐?”가 아닐까 싶다. 참으로 우문인데 현답을 낼 자신은 없지만 미리 반론을 제기하겠다. 꼭 분자요리가 아니더라도 조리의 과학적인 이해는 반드시 필요하다. 반론 끝. 이 책의 소위 말하는 ‘분자요리’ 레시피는 사실 대부분의 가정은 물론이거니와 업장 주방에서도 쉽게 따라할만한 건 아니다. ‘양덕의 왕’인 것 같은 저자  Nathan Myhrvold는 떼부자인데다가 양자역학자로, <팻 덕>등에서 조리한 셰프들을 스카웃해서 비행기 격납고 같은 데 최신 기기를 모두 들여다가 아무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조리 실험을 했다. 장비에 첨가물까지 더하면 재현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러한 최종 결과물이 아니다. 이미 그런 것들은 그들이 집대성하기 이전에 페란 아드리아나 그랜트 아케츠 같은 천재 셰프들이 다 이루었다. 목표는 과정을 보는 것이다. 하나의 상태에서 다음 상태로 가기 위해 이들은 어떤 방법을 썼는지, 또 그 방법을 뒷받침하는 과학적 사실은 무엇인지… 그런 것들을 공부해서 자신의 조리 세계에 쓰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나는 이 책이 번역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번역되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해롤드 맥기 책의 경우처럼 뭔지도 모르고 그런가보네-하고 사서는 블로그에 글 몇 줄 싸지르는데 쓰는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처럼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진짜로 음식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꼭 사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50만원이 넘는 가격은 부담이 되겠지만, 이 책이 품고 있는 내용은 물론 부엌에 둬도 물이며 음식에 손상되지 않는 종이에 최고급 해상도로 찍어낸 품질까지 생각하면 오히려 저 가격이 우습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육즙 새는 타령을 하고 있을 사람들에게는 솔직히 이 정도의 책이 필요 없기는 하다. 일단 해롤드 맥기의 책이라도 좀 열심히 읽어줬으면 좋겠다. 계속 육즙타령하면 정말 음식에 발전이 없다. 공부하지 않기 때문에 발전이 없는 것이다. 물론 상황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주방에서 일하는 건 힘드니까. 그래도 공부는 해야 한다.

*책에는 흠잡을 구석이 거의 없지만,  아이패드 등등과 같은 컴퓨터 기기와 ‘싱크’가 될 수 있는 시스템 같은 걸 생각 못할 사람들이 아닌데 왜 고려가 없는지 잘 모르겠다. 하다 못해 QR 코드라도 레시피나 각 항목에 달아 파라메트릭 레시피를 자동조정해주는 앱 같은 거라도 만드는 증강현실을 더하면 괜찮을텐데. 메일 보내서 물어봐야 할 듯.

 by bluexmas | 2011/09/19 11:32 | Taste | 트랙백 | 핑백(1) | 덧글(30)

 Linked at The Note of Thir.. at 2013/06/23 14:34

… 어떤 요리사 과학자의 이야기: 양념치킨 번외편&lt;Modernist Cuisine at Home&gt;과 통밀 50% 고기식빵요리책 종결자, Modernist Cuisine 아이디처럼 뭔가 보탤 건덕지가 없는 글을 올려주시는지라 늘 열독만 하는데 마침 &lt;Modernist Cuisine&gt;의 사진에 대해 … more

 Commented by skyungs at 2011/09/19 11:43 
으와와와 이 책 사셨군요! 저자의 과학실스러운 조리실을 보고 감탄했던 기억이. 저 책대로 만든 요리의 도대체 맛은 어떨지 궁금하네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11/09/28 11:47
그건 저도 만들 수 있을지 잘 모르겠네요…

 Commented by 사바욘의_단_울휀스 at 2011/09/19 11:53 
사봐야겠네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11/09/28 11:49
Savory Food에 국한되어 있지만 사바욘님께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아요.

 Commented by 제이 at 2011/09/19 12:22 
좋은책일수록 번역본이 많이 나와야되지 않을까요? 뭔지도 모르고 그런가보네하고 글 몇줄 쓰는 사람(저도 그런경우일지도)이라도 그나마 읽는사람도 굉장히 적거나 아님 그 책이 나온줄도 모르는 경우가 많거든요. ㅎㅎㅎㅎ

저 책이 나왔다고 기사는 봤지만 번역본이 나오지 않는 이상 읽기가 어려운 저로써는 제발 좀 아주 비싸도 사줄 용의가 있으니 출판해줬으면 합니다. 엄청 궁금하거든요. ㅎㅎ

 Commented by bluexmas at 2011/09/28 11:49
그렇지만 번역본은 불가능하리라 봅니다. 나오면 가격 백만원…

 Commented by 제이 at 2011/09/28 13:32
백만원 ㅎㅎㅎㅎㅎㅎㅎ

 Commented by 아얀 at 2011/09/19 12:47 
학교 도서관에 구매해달라고 해야겠어요. 소개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11/09/28 11:49
네.

 Commented by 숙성식빵 at 2011/09/19 13:45 
학교 도서관에 구입신청 넣으려고 했더니 이미 2011년 판이 고이 소장되어 있더군요. 역시 대학에는 덕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애쉬 at 2011/09/19 16:49
소장하고 있는 학교가 어딘지 여쭤봐도 될까요?

친구라도 있으면 줄세워 빌려보게요^^

 Commented by 불별 at 2011/09/21 15:55
저도 부탁드립니다 굽신굽신

 Commented by bluexmas at 2011/09/28 11:50
아무래도 학교는 예산이 있으니까요.

 Commented by 애쉬 at 2011/09/19 16:48 
저런 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니 좀 엄청나더군요

그런데…..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군요;;;; 대단해요 역시 덕후중 제일 무서운 덕후는 양덕이군요

근데 지져서 육즙을 봉한다는 전가의 보도, 금과 옥조가 사실이 아닌 것이군요….

이런..아직도 그런가보다 하고 있는데…..좀 더 자세한 정보를 얻으려면 어떻게 찾아보면 좋을지 여쭤봅니다.^^ {몇만원 하는 두꺼운 책 권해주시는 것도 고맙지만 좀 더 저렴한 경로도 아울러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주방의 비법으로 전수되는 것 중에 의심스러운 테크닉들이 몇 있는데… 이걸 실증할 실험이란게 참 수고스럽고 결과물로 보자면 참 쀍 스러운게 많아요… 이런 덕후님들이 궁금한 실험을 요래요래 설계해서 잘 시연해 보여주면 참 좋을텐데…. 볼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 같아서 나서는 곳이 없나봅니다.

좋은 책 소개시켜줘서 감사합니다.

1권 부터 제목이 역사와 기초지식이라니;;; 무슨 대 서사시의 서장 같군요 ㅎㅎㅎ

 Commented by bluexmas at 2011/09/28 11:50
저렴한 경로는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음식과 조리>도 번역본은 7만원입니다.

 Commented by 애쉬 at 2011/09/28 12:50
음식과 조리에 나오는군요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차원이동자 at 2011/09/19 18:02 
왜…왠지 재밌어보인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11/09/28 11:50
차원이동하는 느낌입니다.

 Commented by sonny at 2011/09/19 18:52 
꼭 한번 사서 읽어봐야겠군요. 영국 아마존에도 나와 있던데, 개량이 조금 틀릴 수도 있겠네요. 가격으로 보면 미국이 싸긴 한 것 같던데..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Commented by 루아 at 2011/09/19 23:23 
헉…

사셨군요. 많이 존경스럽습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11/09/28 11:51
별 말씀을요. 사실 가치에 대해 비싼 책도 아닙니다.

 Commented at 2011/09/21 10:38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bluexmas at 2011/09/28 11:51
중년 공룡입니다.

 Commented by 나는고양이 at 2011/09/21 14:26 
어떤 책들은 어려워도 원서로 보고 싶게 하는데, 이 책이 그런 것 같습니다! 손상되지 않는 재질이라뇨. 튄 물에 쭈글쭈글 해진 어설픈 제 요리노트와 사놓은 요리 책자들을 생각하면 결코 아깝지 않다고 봅니다 ;ㅁ;

 Commented by bluexmas at 2011/09/28 11:51
네, 영어 자체는 굉장히 쉽고 간결하게 써서 배우고 싶을 정도던데요.

 Commented by 큐팁 at 2011/09/21 15:44 
네이선 미어볼드가 과학적 바베큐 비법을 언급하는 걸 읽어보니 그저 분자레시피만으로 치부할 것은 아닌듯 합니당. 사실 고기 굽기만 해도 지방이 열분해되어 새로운 분자구조로 고기를 둘러싸서 맛을 내는 것이니..거칠게 말해서 요리가 사실 분자 레시피 아닌게 어디있나 싶기도 하구용. 그나저나 저정도 덩치(?)의 책에 배송료가 18달러인건 진짜 축복인듯..

 Commented by bluexmas at 2011/09/28 11:52
네 전혀 아니죠. 원리를 말하기 위해 그런 단계까지 접근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배송료는 대박이죠 정말…

 Commented by 불별 at 2011/09/21 15:53 
http://www.ted.com/talks/nathan_myhrvold_cut_your_food_in_half.html

이런 우연이! 지금 막 위의 TED 강연을 보고는 완전히 빠져버려서 주인장님께 혹시 보셨냐고 물어보러 왔더니 이미 사셨군요^^;

근데 가격보고 데꿀멍했습니다 OTL 역시 빠른 취직만이 살길…

 Commented by bluexmas at 2011/09/28 11:52
그러나 책의 가치를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가격은 아닙니다.

 Commented by Mesmerizer at 2011/10/04 23:12 
이 끝내주는 책을 사셨다니 부러울 따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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