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oking Out

스피커로 노래를 처음 들었을때, 나는 알아차렸다. 이 노래로만 나의 공간을 메꾸었을때 어떠한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소름이 돋았다. 원하지 않는 것이니까. 두려우니까. 너무 원하기 때문에 막상 때가 되면 피할 수 밖에 없는 것들,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 것들도 사실은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두렵지만, 이루어지는 것도 그에 만만치 않게 두렵다는 사실을. 손에 넣은 다음에 벌어지는 감정의 자유낙하, 그건 간절함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 아침은 어젯밤의 사생아같았다. 무거운 공기 때문에 침대에서 소파로, 다시 침대로 자리를 옮기다가 늦잠을 자고 일어났을때, 사방은 온통 뿌옇고 무거워보였다. 밤이 끝나지 않은 분위기였다. 곧 해가 났을때 나는 무엇보다 수건을 빨아야 되겠다고 생각했다.아주 뜨거운 물을 받아 한 시간 동안 불렸다가 밀린 수건을 다 빨아 널었다.  점심을 먹고 집을 나서자마자 노래를 들었는데, 속에서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기억은 기억이되 무엇인지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는 기억들이 있다. 어떤 기억들에는 꼬리표를 달아놓지 않는다. 기억하고 싶지 않거나, 또는 너무 생생하게 기억했을때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이거나, 극으로 치닫는 것들은 너무 많은 열량 소비를 요구한다. 그래서 그러한 기억들은 조각이 모인 덩어리로만 남는다. 그 둘이 마치 같은 종류인 것처럼 다뤄지는 이유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극과 극이 통하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안정을 미친 듯이 찾았던 시절이 있다. 그때 사람들은 나에게 말했다. 삶은 다리 네 짝 달린 의자이기만 하면 된다고. 그렇게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안심하는 법을 배운 적도 없거니와, 언제나 한 짝이 짧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돌아가면서 그랬다. 어느 한 다리만 고정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오늘은 오른쪽 앞다리가, 내일은 왼쪽 뒷다리가 그랬다. 사람들은 그게 삶이라고 했다. 다들 그렇게 산다며. 그만하면 적당히 잘 균형이 맞는 편이라고 했다. 몇몇 나를 답답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직접 일어나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불안정이 나의 안정에 보탬이 될 수는 없었다.

비단 불안정만이 아니었다. 타인으로부터 가능한 거의 모든 것들을 빌어다가 괴어보려고 했다. 그러면 똑바로 설 수 있을까 싶었다. 누구나 그렇게 하듯 돈부터 시작했다. “스펙트럼”은 긍정의 극에서 중심을 지나 부정의 극까지 흘렀다. 행복과 안정과 위로를 거쳐 두려움과 실패와 피와 땀과 눈물과 체액까지 빌거나 혹은 빼앗아다가 괴어보았다. 그러나 언제나 짧았다. 때로 짧지 않은 경우도 있기는 했다. 그런 경우에는 짧은 만큼 길어서 또 균형이 맞지 않았다. 주로 중심을 지나 부정쪽으로 기울면 그러했다. 길거나 짧거나,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결과적으로 매한가지였다. 무엇을 어떻게 끌어다 괴든 절룩거리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사실은 거짓말을 했다. 어떤 기억에 꼬리표를 달지 못하는 이유는, 타인들이 얽혀 있기 때문이었다. 벌어지는 순간에는 많거나 깊을 수록 좋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지나간 다음에는, 그러니까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렇게 지나갈 수 밖에 없게 된 그 다음에는 그 모든 기억들에서 이제는 의미가 없어진 타인들을 떼어냈을때 얼마만큼 멀쩡해보이는 이야기가 되는지 고민하게 된다. 그래서 어떤 이야기들은 후천적으로 감염된 듯한 결핍을 내재할 수 밖에 없다. 안심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고 가르쳐주지 않은 사람들을 원망하지 못하는 건, 심지어 마음 놓고 원망하는 법조차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배려하는 법을 시전하는 동안 삶은 속으로 아주 깊이 멍들 수 밖에 없다. 이 세상은 더 이상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데 때로 불행한 인간들은 그렇게 고전적이다 못해 케케묵은 가치를 따르고 살아야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입에 담을 수 밖에 없는 말이 ‘Mea Culpa’라는 사실 자체로 어떠한 삶은 참으로 죄악에 가까울 수 밖에 없다.

내일 아침이 제발 오늘 밤의 사생아같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작할때 나는 오늘을 너무 사랑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끝에서는 품고 갈 수 없는 날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오늘은 나에게 잊어야만 하는 날이다. 설레임은 부끄러움이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 그건 무지 때문이다. 무지는 사람을 부끄럽게 만든다. 물론 사생아는 아무 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사생아가 사생아일 수 밖에 없고, 사생아로 밖에 부를 수 없는 현실이 잘못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나에게 ‘네 짝이면 된다’고 말했던 사람들은 또한 그러한 문제에 둔감하다. 물론 우연의 일치는 아니다. 그때는 기억만으로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지금은 기억 때문에 살기 어려운 날이 많다. 모선 노릇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모성애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러나 나는 남자로 태어났다. 그걸 모르지는 않았을텐데 왜? 네 짝이기만 하면 내 짝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짝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당신들 이제는 좋은 짝 만나서 행복하게 살고 있나요, 그때 그렇게 꿈꾸었던 것처럼? 땔감을 충분하게 모아놓기는 했는데, 그게 덜 마른지도 몰랐다는 게 문제였다. 연기가 너무 매캐해서 숨을 못 쉬면 사람들은 그렇게 원하던 따뜻함이 찾아와도 반가워하지 않게 된다. 하긴, 숨도 못 쉬는 판국에 따뜻함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행복도, 안정도, 심지어는 짜증과 불행마저도 숨을 쉴 수 있어야 의미가

 by bluexmas | 2011/07/05 01:52 | Life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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