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맥주 1리터를 30분만에 마셨다. 술이라기 보다, 하루의 기억을 지워줄 약이라는 생각으로 마셨다. 술이라고 말하기에는 썼고, 약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달았다. 어쨌든 지워야할 기억을 쌓은 하루였다.

길고 긴 하루를 행사치르듯 마무리하고 도저히 그 기분으로 집에 들어갈 수가 없어 바에 들렀다가 우연히 안면이 있는 사람과 마주치게 되었다(참고로 어제 하루 일과를 늘어놓자면, 아침에 일어나 베이킹-쿠키가 식는 동안 달리기-강남으로 내려가 세 시간 동안 부업-10분 동안 주변 취재-강북으로 다시 올라와 가족행사). 같이 술을 마시다가 채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채식에도 종류가 꽤 있다 뭐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생선은 먹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옆에서 보드카를 마시던 여자가 “그걸 ‘페스토’라고 하죠?” 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는, ‘페스토’는 이탈리아 음식에서 쓰는 양념류를 이야기하고 그 채식은 ‘페스코’라고 이야기했지만, 그 여자는 믿으려하지 않았다. 애초에 말 섞고 싶은 사람도 아니었는데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니 짜증이 났다. 내가 번역한 책에도 채식에 대한 내용이 나오고, 거기에서 각각의 용어에 대한 정의를 언급한다. 사실을 말해도 믿지 않는 사람과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어느 누구도 언제나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고, 또 이야기할 수도 없다. 그러나 어떤 말은 사실이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거의 대부분 ‘개XX, 잘난체 하고 지랄이야’다. 맞는 걸 말하는 게 잘못인가, 아니면 틀리는 걸 우기는 게 잘못인가. 이런 종류의 상황은 원래 기쁘고 즐거워야 할 삶을 참 피곤하게 만든다. 페스토는 페스토, 페스코는 페스코다. 때려 죽여도. 또한 때려 죽여도 로날드 레이건이지, 도날드 레이건이 아니란 말이다. 이게 무슨 ‘그래도 지구는 돈다’도 아니고 참.

오늘은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고 잤다. 깨어보니 네 시였다.  어제 많이 먹었으므로 딱히 뭔가 먹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무릎 아래가 잘려나간 듯 아팠지만, 그래도 잠시 걷는 게 좋다고 생각해서 강가로 나갔다. 한강이 딱히 사람을 마음을 달래주는 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일단 너무 탁해서 자격 미달이다. 그러나 물의 존재 그 자체만을 즐기겠다는 정도로 욕심을 줄이면, 그럭저럭 만족할 수 있다. 넘실거리는 것이 있고, 그 넘실거리는 것 너머에 또 무엇인가가 있다. 움직임이 있고 그 너머에 기대가 있다. 쉽게 건널 수 없는 것과, 그 건널 수 없는 것으로 매개체로 거리를 두는 것이 있다. 그래서 별거 없지만 있어 보인다. 그만하면 물의 존재는 제 역할을 다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설사 너무나도 탁하거나, 또는 냄새가 난다고 해도.

하지 못하는 말은 언제나 똑같고, 그 대상도 사실은 언제나 똑같다. 고통과 갈등도 사실은 언제나 데자부일 뿐이다. 오늘 트위터에서 ‘힘들게 하는 인연은 놓아주라’와 비슷한 요지의 이야기를 듣고, 놓아주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인연은 결국 족쇄일 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기대한 적 없지만, 실망의 레벨은 언제나 새로운 바닥을 친다. 그것은 생명체라면 어떤 것도 피할 수 없는 노화와 맞물려 살아 있는 순간이 마치 슬픔인 것처럼 인식하도록 만든다. 사실은 그런 게 아닌데, 삶은 그런 게 아닌데.

미워하기는 참으로 쉽다. 원하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장착되어 제거가 불가능한 회로라도 있는 것처럼, 본능적으로 반응한다. 그만큼 용서하기는 어렵다. 없는 것을 만들어 내야 하기 때문이다. 흙으로 빚어 콧구멍에 숨이라도 불어넣듯, 존재하지 않는 감정을 억지로 만들어 내야만 한다. 주변은 온통 사막이라 잘 뭉쳐지는 흙도 없고, 물도 깨끗하지 않으며, 폐활량이 딸려 숨을 불어넣기도 어렵다. 이쯤되면 용서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이니 그냥 미워하고만 살아야 할 것 같다. 아니 사실은, 미움이고 용서고 뭐고 다 떠나서 관련 주제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자체가 나를 힘들게 한다. 더 이상 소모되고 싶지 않다. 비를 기다린다. 골짜기를 채워 줄 홍수를. 어차피 메워지지 않는 틈이라면 차라리 물로 가득 채워 놓고 그냥 바라보며 아쉬워하는 편이 낫다. 가끔 물안개도 자욱하게 껴서 시야를 가려주면 더더욱 좋지 않을까. 어차피 이 삶에서 화해와 용서는 글러먹었다. 누군가의 죽음과 같은 극단적인 동기를 끼고서라도 그건 불가능하다. 이건 어제 오늘 내리게 된 결론도 아니지 않았나. 마음의 평화보다 더 절실하게 원하는 것이 없다.

 by bluexmas | 2011/05/08 23:12 | Life | 트랙백 | 덧글(2)

 Commented by 불별 at 2011/05/09 04:45 
‘잘난체 하고 XX이야’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자신이 먼저 잘난체 했다는걸 생각하지 못하죠.

전 그런 사람들한테 간단히 스마트폰으로 위키 검색해서 보여줍니다. 너무 편해요(….)

 Commented by cleo at 2011/05/09 19:11 
일단, 부산으로 여행 한 번 오시죠..

블루마스님 영접할 팬들이 수두룩(??) 합니다: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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