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스리마스

나흘 하고도 반 나절을 쉬는 동안, 날씨는 계속 흐리고 또 무거웠다. 기분이 정말 계속해서 축축 처지더니, 오늘 오후엔 미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마도 이런 날씨라면 산타마저 오고 싶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루돌프가 그 동네는 우울해서 못 갈 것 같으니 배째라고 나오던가(이번 달 내내 산타와 루돌프가 주먹다짐을 하는 환상을 떠올렸다. 루돌프가 이겨서 산타가 썰매를 끌고 루돌프가 채찍질하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_<;;;;)…

다 지나갔지만 산타 얘기를 하자면, 마지막으로 그 양반이 선물을 주었던 건 초등학교 5학년때였다. 뭔가 대면을 해보겠다고 기다리다가 잠깐 잠이 들었는데, 그때 살던 아파트 현관의 신발장 위에 책이 포장되어 놓여있었다. 그런데 그 포장지에 내 이름을 쓴 글씨가 엄마의 그것이었으므로, 나는 “엄마, 왜 산타 할아버지 글씨가 엄마 글씨랑 똑같아?” 라고 물어보았고, 그 양반은 다음해부터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마지막 선물로 받은 책은 불핀치의 그리스 신화였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게 처음 읽었던 그리스 신화는 아니었던 것 같다. 분명히 몇몇 전집에 축약된 그리스 신화가 구색을 갖추기 위해 있었던 것 같으니까. 그렇지만 이때 받았던 책은 300쪽은 넘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적어도 중학생을 위한 책이었다. 어쨌든 그리스 신화는 마지막 선물답게 상당히 좋아했었다. 일단 너무나 많은 등장인물-신?-들이 제각기 다른 역할이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진진하게 다가왔고, 제우스의 남자다움(?)으로 인해 얽히고 섥히는 관계의 복잡함 역시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지만 재미있다고 생각했었다. 아, 나도 커서 제우스와 같은 남자가 될테야, 라고 동심에 푹 쩔은 소망도 한때 품었던 것 같지만, 어째 지금 내 꼬라지를 보면 한 여자도 옆에 못 둘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건 대체 왜…

어쨌든 다시 날씨 얘기로 돌아와서… 차라리 비가 주룩주룩 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러나 비가 오면 집에서 달리기 대신 운동하려고 줄넘기를 사왔다…그래도 운동은 해야지). 왜? 달리기하기가 너무너무 지겨웠으니까. 어느 정도 지겨웠냐면, 지겹다는 얘기하는 것조차 지겹다고 느껴질 정도로 지겨웠다.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해가 다 진 다음에나 달리기를 할 시간이 생겼는데, 집 근처 도로에는 가로등이 없으므로 뛰다가 차에 치어죽을 것 같아서 집 앞 공원에 나가서 가로등이 켜진 주택가를 돌고 또 돌았다, 10km를 채울 때까지. 역시 힘든 건 몸이 아니다. 똑같은 길을 계속해서 뛰고 있노라면 가끔은 돌아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것도 아니면 다 뛰고 난 다음에 뭘 했는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거나… 오늘은 일요일이니까 공원의 산책로를 뛰어서 15km를 뛰었는데, 너무너무 뛰기 싫어서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내 삶을 잠시잠깐 원망했다. 역시 집에 돌아와서 저녁을 먹고 나니 그 시간에 뭘 했는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다음 주까지 학교 체육관이 문을 닫아서 이번 주 내내 어두운 주택가를 뛰어야 할 것 같다. 삶이 내 앞에서 허물을 벗고 고행으로 거듭 태어나는 걸까, 지금…

이렇게 나흘 정도 놀고 가면 관성이 붙어서 정말 회사에 영원히 가고 싶지 않아진다. 1월 초까지 해야 될 일이 없었더라면 아마 있는 휴가랑 병가를 다 써서 1월 초까지 놀았을 것 같다. 그러면 회사에 더더욱 가기 싫어지겠지… 어쨌든, 버릇처럼 오늘 오후가 되자 만들다가 팽게쳐두고 온 모형 생각이 났다. 이럴 때마다 정말 내가 싫다. 일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닌데 대체 생각해서 뭐하게… 가끔 스스로 생각하기에 이 블로그에 글 쓰는 것보다도 일에 열정을 안 쏟는다고 생각할 때가 있고, 그런 생각이 들면 우울해진다. 그건 뭐 일을 열심히 해야 되는게 인지상정! 이라서 그렇게 생각하는게 아니라 이렇게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 그렇게 헐렁한 마음가짐으로 회사를 다니는게 결국 나에게 독이 되는 것 같아서…그게 그건가, 따지고 보면.

잡담의 마지막은 영화 얘기. DVD까지 합쳐 노는 동안 네 편의 영화를 봤다. DVD는 일본 만화 사이보그 009와 American Teen이라는 다큐멘타리, 극장에서는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과 Doubt를 보았다. 사실은 Valkyrie도 보고 싶었으나 사흘 연속 영화보러 밖에 나가는게 귀찮았다. 가뜩이나 종교에 편견이 많은 사람이다보니 탐 크루즈가 사이언톨로지 신자라는 사실에 좀… 나도 종교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종교에 쩔은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어쨌든 영화 얘기로 돌아와서, Benjamin Button은 기대만큼, 아니 약간 기대 이상이었고, Doubt는 뭐 그럭저럭…

참, 글의 제목에 ‘영감’을 준 신문의 사진을 찍어 올린다. 우리나라에서 1면에 이딴 오탈자 나오면 담당자 회사 나가야 되지 않나? 하긴, 나랑 같이 이거 본 사람은 대체 뭐가 이상하냐고 미친 듯이 웃는 나를 미친 것으로 생각하더라고… 사족같은 얘긴데, 25년도 더 지났어도 아직 기억에 선명한 어이없는 오탈자는, 80년대에 즐겨 보던, 지금은 어용이라고 생각되는 잡지 ‘리더스 다이제스트’ 의 것이었다. 기사의 제목은 ‘타조 이야기’, 뭐 타조가 어떤 새인지, 알이 커서 반숙에만 45분이 걸리고 어쩌구저쩌구…  이런 얘기가 나온 것이었는데, 각각의 페이지 맨 위 가운데에 글의 제목 ‘타조 이야기’ 가 조그맣게 찍혀 있던 가운데 어떤 페이지에 무려 ‘터조 이야기’ 라고 찍혀 있었더라는… 그때 가족이 다 같이 기차를 타고 주말 여행을 가고 있었는데, 그걸 보고 다 같이 미친 듯이 웃어서 같은 칸에 있던 사람들이 다 미친 가족인줄 알았다고…

 by bluexmas | 2008/12/29 14:52 | Life | 트랙백 | 덧글(6)

 Commented at 2008/12/29 16:3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8/12/29 18:5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이웃 at 2008/12/29 19:31  

커피마시러 나와 bluexmas님 블로그에서 ‘크스리스마’ 보고 삐져나오는 웃음 참느라 혼났습니다. 참 간만에 즐거웠어요 🙂

전 서쪽바닷가에서 나름 힘든 삶을 살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나 블로그에서 곁눈질 하는 게 큰 즐거움 중 하나에요. 올리신 글 보며 웃음지을 때가 많은데 한번도 다녀갔다 인사드린 적 없어서 오늘은 인사겸 글 남깁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살면서 더 재밌는 것들 많이 찾아내시길 기원합니다.

 Commented by basic at 2008/12/30 07:10 

아니 어릴 때에도 엄마글씨와 산타글씨를 대조해보는 치밀함이! ㅋㅋ 대면해보겠다고 나선 어린 시절의 bluexmas님을 상상해보니 너무 귀여워요.

 Commented by bluexmas at 2008/12/30 14:06 

비공개 1님: 아, 한글 오타도 그렇지만 영어 오타도 개망신의 지름길이라니까… 그나저나 요즘 연락도 못 했는데 두 아이들은 어떻게 자라고 있는거냐?

비공개 2님: 기억하죠! 웬만하면 답글 한 번이라도 남겨주신 분들은 기억한답니다. 시애틀도 아주 춥지는 않아서 눈이 많이 안 온다고 알고 있는데, 눈이라니 동네랑 분위기가 너무 잘 맞을 것 같아요. 지난번에 퀘스트 필드에서 열린 미식축구 중계를 잠깐 봤는데 눈이 와서 너무 멋지더라구요. 저도 다음 달에 첫 번째 시험 보려고 이제 공부 시작하는데요, 최근에 바뀌어서 일곱 과목을 본답니다.

이웃님: 서쪽 바닷가에 사시는 분들이 많네요. 다음에는 ‘이웃’ 보다 조금 더 덜 가명 같은 이름으로 인사 나눴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제가 기억을 더 잘 할 것 같더군요. 하여간 반갑습니다.

basic님: 그래서 선물 뚝 끊긴거죠 뭐 입 다물고 가만히 있었어야 할 것을…^^ T_T

 Commented at 2009/01/02 14:42 

비공개 덧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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