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식(문화)의 언어

‘참숯에 보관한 다시마를 다양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도록 적당한 크기로 절단하여 조리하기 편리한 다시마입니다.’

대체 무슨 말인가? ‘다시마’가 쓸데없이 두 번이나 나오는 것도 어색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의식의 흐름대로 늘어 놓은 구어를 그대로 옮겨 적은 듯한 문장은 길지도 않은데 호응도 안 맞고 혼란스럽다. 물론 이건 별처럼 많고 많은 예 가운데 고작 하나일 뿐이다. 식품은 물론 길거리에 널린 음식점이 쓰는 홍보 문장도 전혀 다르지 않다. ‘저희 00옥 불고기는 명심보감에서 효능을 보장한 쇠고기 채끝으로 만든 온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명품 보약을 엄마의 정성으로 만듭니다.’

물론 이건 지금 내가 생각나는 대로 지어낸 것이지만, 한국의 식문화에서 쓰이는 문장 혹은 문구는 대체로 두 가지 패턴을 반드시 포함한다. 첫째, 마치 난수 생성기에서 숫자를 뽑아내듯 아무말이나 조합해 문장을 만든다. 그야말로 비빔밥처럼 자신의 음식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을 전부 뭉뚱그려 놓는다. 둘째, 반드시 한 문장이어야 한다. 설사 내용이 한없이 많아지더라도 문장을 나눠서는 안되며, 다시마의 예처럼 중간에 쉬어가지도 않는다.

이런 문장, 더 나아가 언어에 둘러싸여 살다 보면 최영미 시인의 ‘호텔에 거주하는 대가로 문장을 고쳐주고 싶다’라는 발언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식(문화)의 언어는 정리가 안된 뒤죽박죽 엉망진창인데 아무도 손을 대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국가 기관인 국립국어원은 ‘닭도리탕’을 ‘닭볶음탕’으로 “순화”해야 한다는 식의, 숲은 전혀 무시하고 나무나 손을 대려는 접근을 지지부진하게 고수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단순한 음식, 혹은 식문화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기본적으로 한국어가 경제적이지 않다는 의구심을 품고 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용자의 습관이 마치 한국어가 경제적이지 않은 언어인 양 착각하게 만든다. 한국어로도 얼마든지 간결하고 경제적으로 말하거나 쓸 수 있는데 의사가 전달되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이나 위계를 향한 순응 탓에 비효율적인 언어습관을 배양하다 못해 장려하는 상황이라는 말이다.

한편 음식 쪽에서는 맛을 묘사하는 체계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아 상황을 악화시킨다. 일단 믿음과는 달리 맛을 표현하는 어휘가 다양하지 않으며, 한술 더 떠 다양하지 못한 어휘를 실제의 의미와 다르게 쓴다. ‘쫄깃하다’가 대표적인 경우로, ‘한식의 품격’에서 언급한 것처럼 조리의 실패 등으로 인해 사실은 질긴 상태를 미화하는 용도로 쓰이다 못해 이젠 그런 질감과 무관한 식재료 혹은 조리의 결과물마저 장점을 묘사할 때는 쫄깃함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여기에 외국어의 고민 없는 차용이 결정타를 날린다. 서양의 음식이라고 해서 출신 문화권의 언어로만 설명이나 묘사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음식과 더불어 들어오는 말을 정확히 정리 및 분석해서 번역해야 할 것과 외래어로 들여올 것을 분류해야 되는데, 대체로 별 다른 고민 없이 그대로 들여온다. 대표적인 예가 와인과 커피의 언어이다. ‘바디감’이니 ‘구조감’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국적 불명의 표현은 대체로 출발 언어의 사전적 및 식문화적 맥락에서 교차점검하면 좀 더 쉽게 의미가 통하는 말로 번역이 가능하다. 하지만 무차별적인 도입과 더불어 이런 국적불명의 언어체계가 해당 ‘바닥’ 전문가의 자격을 드러내는 표식처럼 통하는 현실이니 미래는 비관적이다.

이 밖에도 한식 언어의 과제는 얼마든지 더 널려 있다. 표준안을 책정했다지만 과연 한식의 영어 표기는 효율적인가? 라이프스타일을 드러내주는 수준 이상의 요리책이 국내 저자에게서 잘 나오지 않는 현실에서 과연 외국의 요리책은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그 많은 조리도구와 문법의 언어는 어느 만큼 번역이 가능하고 또 어느 만큼 외래어를 그대로 들여와야 하는가? ]

마지막으로, 이렇게 빈곤하고 비효율적인 생활 및 음식 언어의 체계가 요리 실무자의 체계적인 사고에는 과연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일까? 실무자는 자신의 요리 세계를 간결한 개념적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가? 이를 위해 교육기관과 현장에서는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한식의 언어가 해결해야 할 과제는 태산만큼 크고, 우리는 그것을 삽도 아니고 밥숟가락도 아닌 찻숟가락으로 떠 옮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