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리 노동의 소비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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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 대관원에 대한 글을 써 올리고 바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이 글을 ‘니들이 내 동네 단골집을 망쳤어’라고 읽을 것이라고. 안타깝게도 아니다. 나는 그저 궁금했을 뿐이다. 돈을 냈으니까 먹기만 하면 그만인 걸까? 너무나도 비합리적인 강도로 음식점에 압박이 들어가는 게 보인다면 그저 지갑을 열고 먹는다고 끝일 수가 없다. 그리고 우리는 노동력을 비롯한 재화의 생산 여건과 얽힌 윤리적 소비의 존재 및 중요성에 대해 모르지 않는다.

일단 음식 밖에서는 소비재 가운데서도 전자제품과 옷의 생산 여건에 대해 늘 상기할 것을 요구 받는다. 중국의 전자제품 공장 환경이나 동남아시아, 남아메리카의 의복 생산 여건은 이미 잘 알려졌다. 소위 ‘스웨트샵’ 말이다. 음식에서도 상황은 똑같다. 일단 식재료 생산과 관련한 인간의 안녕과 복지라면 미국, 특히 서부의 불법 이민 노동력에 의한 농사가 떠오른다. 불법 이민 노동자가 열악한 여건에 생산했다면 과연 몸에 좋은(확실치 않지만) ‘유기농’이라고 해도 의식 없이 소비해야 하는 걸까? 궁극적으로는 각자의 선택이라 믿지만 한 번쯤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한편 음식의 울타리 안이라면 인간 뿐만 아니라 다른 동식물의 안녕 또한 지갑을 열 때의 고려사항이 될 수 있다 (사실 어느 분야는 안 그렇겠느냐만). 이를 반영해 식재료의 생산에서는 소비 윤리를 의식할 할 수 밖에 없도록 시스템이 변했다. 이젠 또 하나의 홍보 전략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온갖 인증 제도 등이 식재료의 기원부터 유통 등에 이르는 과정에 의미를 부여하고 상기하도록 자극을 주고 또 압박한다. 유기농이니 동물복지, 돌고래 희생 없이 잡은 참치 등등이 여기에 속한다. ‘소비를 통해 대의에 보탬이 된다’는 생각이 때로 일종의 덤처럼 작용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나는 음식이 식탁에 오르기 직전의 최종 단계, 즉 조리 노동에 얽힌 소비 윤리에 대한 논의가 재료 생산 등의 여건에 비해 아직 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본다. 물론 이쪽도 넋을 놓고 있는 상황은 아니다. 이를테면 학교 등의 급식장이나 일반 음식점의 조리 인력-특히 여성-에 대해서는 소비자가 일정 수준 인식하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에 비해 사다리의 맨 꼭대기에 있는 음식, 즉 파인 다이닝의 조리 인력에 대한 소비 윤리는 아직 인식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매체의 리뷰를 위해 평소보다 활발하게 레스토랑을 다녔던 시기에, 나를 가장 힘들게 만들었던 요인도 바로 전반적인 조리 노동에 대한 소비 윤리였다. 굳이 어디라고 특정할 필요나 이유도 없다. 식탁에 앉아 있으면 유리벽 너머로 다 보인다. 많은 조리 인력이 각각의 접시에 달라붙어 요리를 완성시킨다. 어디나 눈으로 어려움 없이 연령대를 확인할 수 있는 여건이었기에, 나는 언제나 접시와 주방을 번갈아 들여다 보며 의구심을 품었다.

과연 저들은 정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일하고 있을까? 아니라면 내 앞에 놓인 요리가 아무리 맛있다고 해도 의미가 없는 건 아닐까? 실제로 몇몇 레스토랑에서는 이러한 점에 대해 쓰려는 시도도 몇 번 했지만, 일단 당시의 상황에서는 음식에 집중하기도 모자라다는 생각이 너무 지배적이어서 일단 글로 옮기지는 않았다. 한국의 식문화에 퍼져 있는 문제가 너무나도 공통적이기에 매번 그에 대해서 지적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누구라도 문제 삼을 수 있는 노동 여건이나 복지 인권 등의 문제와 별개로, 나는 음식 자체에 대한 궁극적인 회의를 품고 있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나의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반드시 많은 인력이 완성시킬 수 밖에 없는 음식의 유형 또는 문법이 존재하고, 이것들이 맛을 비롯한 외식 경험에 미치는 악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고 믿는다.

기본적인 서양 음식의 구성을 생각해보자. 흔히 ‘조립 공정(Assembly Line)’이라는, 자동차나 전자제품 같은 재화의 생산과 흡사한 분업 공정을 적용할 수 있도록 각 요소가 분리되어 있다. 스테이크라면 고기를 굽는 이, 채소를 준비하는 이, 소스를 끓이는 이가 따로 있으니, 주문에 맞춰 각 요소를 각자가 준비한 뒤 접시에 순차적으로 담으면 최종 책임자-주로 셰프나 수 셰프-가 최종 점검하여 내보내는 방식이다. 그리고 각 단계의 난이도와 주방의 지위 및 서열은 연결되어 있다. 단순한 조리에서 시작해 점차 단계를 밟고 올라가며 어려운 조리를 책임진다. 물론 이러한 공정은 단지 실시간의 조리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허드렛일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재료의 손질-그렇지만 파인 다이닝의 수준이라면 절대 ‘단순 노동’이라고 폄하할 수는 없는-같은 단계에서도 서열과 맞물린 기술 수준에 따라 인력이 투입된다.

이러한 기본적인 조리의 문법에 현대요리가 가세했다. 이제 완전히 장르(혹은 메타장르)라고 일컬어도 될 현대요리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1. 한 접시의 요리에 더 많은 가시적 요소가 개입하거나 2. 비가시적이라고 할지라도 더 많은 공정을 거친다. 이는 현대요리가 한편 재료의 통념적인 물성을 조작해 일종의 극적 효과를 이끌어내는데 천착한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블루레이로 합본 재발매 된 ‘180일간의 엘불리’와 ‘지로 스시의 꿈’을 함께 보면 주방의 투입 인력이나 공정 등의 차이를 단박에 확인할 수 있다). 한마디로 완전히 단순 노동이라 할 수 없지만 기술 수준이 높지는 않은, 따라서 경력이 짧은 조리 인력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진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 반대다. 경력이 짧은 조리 인력을 집중 투입해 요리의 구성 요소를 확보하는 경향이 요리의 형식 때문에 강화된 것이라고 봐야 하겠다.

한편 이러한 요리 양식이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다소 기묘하다고 할 수 있는 변형 과정을 거친다. ‘한식의 품격’에서 반찬문화로 지적한 소위 ‘양으로 수렴하는 수’의 만트라가 강하게 파고 든다. 한마디로 많이 내놓는다. 전채나 주요리에도 많은 시각적인 요소가 개입하지만, 아뮤즈 부시에서 굉장히 두드러진다. 분명히 있지만 없다고 믿는 이 “한 입 거리”의 가짓수를 늘리는 동시에 자질구레한 요소를 가득 채운다. 작은 여러가지가 한꺼번에 나오니 막말로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 보이는 것만큼의 즐거움은 주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왜 그럴까. 일단 생생함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어제든 아침이든, 미리 만들어 놓은 요소들을 조합해 하나의 요리를 완성시키므로 생생함이 떨어질 수 있다고. 그러나 사실 이건 부차적인 문제라고 본다. 그보다 애초에 요리의 설계 자체가 맛보다 시각적인 경험 위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게 맞다. 경력이 짧은 조리 인력을 집중 투입해 만든 요소만을 결합해 거의 ‘오브제’에 가까운 요리를 만드는 쪽으로 접근한 것이다. 그리고 이게 내가 현재의 파인 다이닝에서 조리 노동의 소비 윤리를 가장 우려하는 지점이다. 한마디로 사람을 ‘갈아 넣어’ ‘있어 보이게’ 만드는 요리가 일종의 문법처럼 자리 잡았다는 말이다.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다.

마지막으로 ‘너의 꿈을 이루는 길이니까’라는, 소위 열정의 논리가 이러한 형식에 힘을 실어 줄까봐 또한 크게 우려한다. 위에서 언급한 급식장이나 일반 음식점의 조리 노동은 그야말로 궁극적 생계의 수단이므로 순수한 노동의 차원에서 문제에 대해 접근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파인 다이닝의 세계에서 준수되지 않는 노동 여건 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때, 이를 ‘젊은이들의 꿈을 이루는 과정’이라고 ‘실드’ 쳐주는 사례가 나오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결론은? 생각해보자는 말이다. 음식과 주방을 번갈아 보는 것만으로도 ‘젊은 인력을 갈아 넣는 수준’에 대한 ‘각’이 나와 망설이게 되는데, 실제로 노동 여건이 준수되고 있지 않다면 소비 윤리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대학 재학 시절, 방학 때 중규모의 건축회사에 ‘실습’을 나간 적이 있다. 학점 등이 보장되는 것도 아닌 일종의 알바였지만 보수는 교통비 명목의 실비가 전부였다. 물론 이 회사나 내가 당시의 통념에서 딱히 크게 벗어나는 거래를 한 것도 아니었다. 소위 ‘배운다’는 명목으로 방학 기간은 물론, 실제로 입사한 다음에도 일정 기간 돈을 받지 않고 일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한편 학교에서는 ‘배운 거 다 필요 없고 회사 들어가면 연필 깎는 법부터 배운대’라는 말이 돌며 이러한 부조리를 배움의 차원에서 정당화하려는 논리가 팽배했다.

딱 20년이 지난 지금, 이제 건축 회사에서는 연필을 쓰지 않을 것이다(사실 10년 전에도 안 썼다). 그렇다면 연필 깎는 법 같은 건 더 이상 배울 필요도 없을 텐데, 과연 요즘도 배움을 빌미로 불합리함을 정당화하려 들까? 그런 부조를 겪고 기성세대가 되었다면 선택은 둘 중 하나다. 내가 그랬으니 젊은 세대도 그래야 하는가, 아니면 반대로 내가 그랬으니 젊은 세대는 그러지 않도록 이 악순환의 소리를 끊어야 하는가. 나는 답이 아주 명백하다고 믿는다.

2 Comments

  • 오창훈 says:

    항상 응원합니다 선생님
    언젠간 계란으로 바위가 깨지겠지요

  • sneaker says:

    급여만 봐도 깔 거리가 넘치는 곳이죠. 밝은 별들에 가려진 왜성의 칙칙한 모습도 심각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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