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든 램지 단상 (2)-하와이안 피자와 평론가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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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다 보니 길어져 두 편으로 나눠 쓴다는 게 가장 큰 동기를 빼먹는 결과를 낳았다. 고든 램지에 대한 단상의 뿌리였던 하와이안 피자 말이다. 올해 초였나, 고든 램지가 하와이안 피자를 증오한다는 이야기를 주워듣고 나는 한참 생각했다. 그전까지는 하와이안 피자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가끔 먹었고, 조합에 딱히 문제가 있다고 느꼈던 적이 없다.

단맛이 두드러지는 몇몇 과일은 고기, 특히 돼지고기와 가공육에 굉장히 잘 어울린다. 한국에서는 익지 않는 멜론과 억지로 짝을 맞추는 바람에 짝짓기의 빛이 좀 바래는 경향이 있지만 멜론과 프로슈토의 조합이 대표적인 예다. 프로슈토를 다른 가공육으로 바꿔도, 또한 과일을 파인애플이나 복숭아 등으로 바꿔도 어울림의 큰 그림이 망가지지 않는다. 고기-가공육만 가능한 짝짓기인가? 그렇지도 않다. 짠맛의 지방-단맛의 과일이 밀고 당기는 맛의 짝은 치즈와 과일로도 자아낼 수 있다. 포도와 일반적인 경질 치즈 (체다 등등?)은 물론, 페타치즈와 수박의 조합도 일반적이다.

하와이안 피자도 이 조합에서 전혀 벗어나지 않는다. 탄수화물이 모든 맛의 바탕을 깔아주고 그 위에 토마토의 감칠맛이나 신맛이 말하자면 ‘식탁보’로 얹힌다. 치즈와 베이컨 또는 햄 등이 짠맛과 지방을 제공하고 파인애플이 단맛(과 신맛)으로 균형을 잡아준다. 생활인으로서 하와이안 피자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없더라도(다른 조합을 먼저 찾으니까), 이 구성 자체가 음식으로 논리나 완결성이 떨어진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게다가 파인애플의 조직은 오랜 조림 등에도 견딜 정도로 질긴 편이라 피자에 올려서 굽는다고 크게 문제될 게 없다.

그래서 나는 고든 램지의 취향에 힘입어 하와이안 피자를 향한 증오가 조금 과장을 보태 활활 타오르는 것을 보고 살짝 놀랐다. 이렇게 미움을 살만한 음식이란 말인가? 피자 위에 얹은 피자와 ‘엄마 집밥 같은 피자’가 마치 멀쩡한 것처럼 존재하는 피자 생지옥에서 파인애플 피자 정도가 이상한 음식 취급을 받는다니 웃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논리는 무엇인가.

일단 역사를 레퍼런스 삼아 하와이안 피자의 당위성을 부정하는 주장이 있다. 하와이안 피자가 사실은 하와이에서 탄생한 음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맞는 이야기다. 하와이안 피자의 고향은 캐나다며, 그리스인이 만들었다. 좀 웃기지만 모두가 이탈리아 음식이라고 믿는 시저 샐러드도 사실은 멕시코에서 비롯되었다(심지어 라치오 지방에서 비롯되었다고 밝히는 이탈리아 요리 컨텐츠를 보라).

그래도 이탈리아 이민자가 만들었으니 그만하면 정통성이 확보된 것 아니냐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내가 그리스 인이라고 해서 우리 가문이 다이너를 운영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마라’라는 말이 있다. 그리스계에게 종종 들었다. 북미에서 많은 그리스인이 요식업에 종사하므로 일종의 스테레오타입이 형성되었다는 의미인데, 그 이면에 음식과 맛에 대한 이해가 깔려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면 딱히 이상할 것도 없다. 다시 말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맛의 조합을 따지고 본다면 태생이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음식이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생각과 논리의 산물이고, 이는 행간의 축적을 읽지 못하고 문자 그대로의 지식만 나열하는데 쓰이는 역사보다 때로 더 맛에는 보탬이 될 수 있다.

다음은 좀 더 골치아픈 영역이다. 이를테면 이런 이론이나 분석이 전혀 먹히지 않는 부류가 있다. ‘어쨌든 피자에 과일은 아님’, ‘하와이안 피자는 내 취향이 아님’이라고 딱 잘라서 선을 긋는 부류 말이다. 나는 언제나 이런 부류가 착각을 한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자신의 취향이 원리나 이론 위에 존재한다는 착각 말이다. 그래서 나 같은 평론가가 설득, 더 나아가 교육을 위해 존재한다는 착각에 빠졌다고도 믿는다. 나는 종종 이런 부류들이 내 글이나 책 등에 대체 왜 반응을 굳이 하려 드는지도 이해하기 어렵다. 자신의 취향이나 주장을 굳이 알려야 되겠다면 말리지 않겠지만 굳이 ‘영양가’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대체로 자신의 취향을 세상 (거의) 모든 사물의 가치판단 기준으로 삼는 부류에게는 설득이든 교육이든 별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고 딱히 신경쓰지 않는다. 그들이 피자에 파인애플을 싫어하고 초가집을 좋아한다고 해서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평론가는 한편으로 명백한 원리나 개념에 대해 재진술을 할 뿐이다. 하와이안 피자 따위의 음식이 존재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아서 말하고, 이를 바탕으로 잘 만든 하와이안 피자와 못 만든 파인애플 피자를 구분할 뿐이다.

그런 과정에서 하와이안 피자가 평론가의 취향인지 아닌지는 딱히 중요하지 않다. 무엇보다 내 취향에 맞더라도 원리와 개념에는 맞지 않는 것도 존재할 수 있고, 그 반대도 얼마든지 가능하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러한 판단의 바탕을 위한 근거는 이미 100살도 못 살 일개 평론가의 존재 이전에 존재하던 것이다.

게다가 다음의 선결 조건 또한 따져봐야 한다. 1. 취향이 모두의 믿음처럼 정말 존재하는가? 더 할 말이 있지만 하지 않겠다. 2. 1의 대답이 ‘그렇다’라면 그 취향은 과연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만약 답이 오로지 ‘직관’일 뿐이라면 역시 논쟁의 여지는 없다. 직관이 의미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직관도 중요하다. 다만 음식의 세계에도 직관 너머에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평론가가 그것의 존재나 당위성까지 입증해야할 필요는 없다. 누군가가 파인애플 얹은 피자를 증오한다면 그건 그 나름대로 존중해야 할 사안일 수는 있겠지만, 설사 백 보 물러서서 존중한다고 해서 파인애플 피자가 갖춘 음식으로서의 당위성이 무용지물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비평이든 뭐든 음식 담론이라는 게 별 쓸모가 없을 것이다. ‘케이크를 가지고 있으면서 먹을 수 없다(You can’t have a cake an eat it too)’라는 표현이 있다. 한꺼번에 두 가지를 손에 넣을 수가 없다는 의미인데, 종종 음식을 먹으면서 같은 생각을 한다. 입은 하나고, 먹는 동안 말을 하면 음식이 튀어나와 꼴불견일 수 있다. 음식의 제반 담론은 먹는 순간에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럼 음식을 씹는 동안 놀린 입으로부터 튀어나온 음식처럼 오로지 추하기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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