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든 램지 단상 (1)-셰프의 두 갈래 길, 제이미 올리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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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http://amahighlights.com/gordon-ramsay/

‘국맥’ 가운데서도 최악인 카스의 광고를 찍고 방한해 요리쇼에 출연한다는 고든 램지 이야기를 좀 해보자. 그는 이제 더 이상 드디어 ‘키친 나이트메어즈’를 진행하지 않는다. 재방송이야 마르고 닳도록 나오겠지만 영국와 미국 모두 2014년 이후로 더 이상 새 쇼를 제작하지 않는다. 나랑 상관 없는 일이지만 나름 기뻤다. 직업적인 음식 먹기는 때로 한없이 고통스러울 수 있다. 저런 종류의 쇼 출연은 부와 명예의 수단이겠지만 어쨌든 음식은 궁극적으로 먹어야 하는 것이고 분명히 몸에 영향을 미친다(그러니까 하루에 파스타 일곱 접시 먹었다는 글 같은 건 쓰면 안된다).

아니, 몸에만 영향을 미치면 참으로 다행이다. 오히려 감정에 영향을 더 많이 미칠 가능성이 높다. 유능한 이들은 때로 평범하거나 그보다 못한 이들의 열등한 결과를 참아 넘기지 못한다. 특히 그것이 당사자는 그렇지 않아도 믿지만 자신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태만함이라면 분노할 가능성도 높다. 나는 늘 그의 쇼에서 그런 감정을 느꼈다. 못하면 더 열심히 해야 되는데 안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건 단순하게 나쁜 실력보다 더 저런 종류의 사람의 분노를 격렬하게 폭발시킬 수 있다.

나는 그가 입담 등등에 비해 훌륭한 셰프라고 믿지만 최근 잠이 오지 않을때 여러 요리 영상을 둘러보다가 의구심을 좀 품게 되었다. 특히 이 초콜릿 케이크 조리 영상은 좀 참담했다. 모든 걸 떠나 저렇게 불룩하게 솟아오른 케이크라니. 반죽의 양에 비해 팬이 작아서 생기는 아주 기본적이고 전형적인 문제고, 균일하게 구워지지 않을 것이므로 케이크의 완성도에 분명히 영향을 비친다. 물론 일정 수준 솟아오를 수도 있지만, 저정도라면 ‘일정 수준’의 너덧배는 될 것이다. 과연 그는 이게 이상하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그냥 넘기기에는 너무나도 기본적인 요인이라 그렇게 생각하기가 힘들다. 다른 영상의 음식도 딱히 좋아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나에게는 좀 피곤해보인다.

피로함은 누구에게나 어느 직업에게나 문제겠지만 요식업에서는 특히 치명적이라 믿는다. 육체와 정신의 피로가 상대방의 꼬리를 문 뱀처럼 맞물리며 서로를 소진시키는 그림을 상상한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50이 넘어서 주방에서 요리를 ‘풀타임’으로 하는 건, 적어도 나는 바람직한 일이라고 믿지 않는다. 이렇게 소모가 큰 직업이기에 나는 아주 적은 예외 말고는 한 가지만 잘 할 수 있다면 굉장히 훌륭하다고 믿는다. 아주 크고 거칠게 분류하는 셰프의 두 갈래 길 말이다. 바로 엔터테이너로서의 셰프와 장인/예술가로서의 셰프다. 전자는 새로운 맛의 경험을 제안하지는 않지만 음식을 바탕으로 라이프스타일을 설정하고 전달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그 라이프스타일이 홍보의 수단으로 작용해서 손님을 레스토랑으로 불러 들인다. 매체에서 보여주는 요리와 음식의 경험을 체험하고 싶은 욕구를 자극하는 것이다.

후자는 반대로 생각하면 된다.  이들도 종종 매체에 등장하고 각종 강연에 연사로 모습을 비치지만 스스로를 엔터테이너라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딱지가 붙으면 자아내려는 맛의 세계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자신의 세계를 진정으로 알아주지 않는다면, 호기심이나 채우려면 레스토랑에 찾아올 필요도 없다고 단호하게 선을 긋는 부류다. 때로 ‘미친 과학자’처럼 새로운 맛의 경험을 위해 미세한 세계로 자꾸 파고든다. 명예는 비교적 쉽게 얻을 수 있어도 부는 궁극적으로 찾아오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당사자가 둘 다 원하는지 여부와 상관 없다.

그럼 두 부류 가운데 후자가 더 우월한 셰프인가? 정확하게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다양성이 음식 세계의 최대 미덕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전자만 넘쳐도 피곤하고, 후자만 넘치면 전자의 과잉보다 더 피곤할 가능성이 높다. 모든 음식이 언제나 항상 새로운 경험, 오랫동안 인상에 남을 자극이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피로가 더 빨리 찾아오고, 오히려 음식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그래서 둘 다 존재하는 세계가 바람직하고, 적절히 균형도 맞출 수 있다면 더 좋다. 나파 밸리의 시끌벅적한 레스토랑에서 10년 가깝게 매일 파티를 준비하는 모습을 쇼에서 본 셰프의 음식을 직접 먹어보는 경험은, 설사 평범함이 미덕일지라도 먹는 이에게 휘발적이나마 기쁨을 안겨줄 수 있다.

하지만 피로는 궁극적으로 반드시 찾아온다. 후자 세계의 피로는 바로 위에서 이미 언급했다. 일종의 감각적 과부하다. 모든 요소가 감각을 두드리도록 철저하게 설계된 음식(과 그 행렬, 즉 코스)는 이미 식탁 위에서 먹는 이를 소진시킬 수 있다. 한편 전자 세계의 피로를 나는 좀 더 장기적이자 피상적인 종류로 인식한다. 먹지 않아도 언젠가는 찾아오는, 이미지를 향한 피로감이다. 어찌 보면 2, 30대의 히트곡 몇 곡만으로 끊임없이 순회공연을 벌이는 6, 70대의 ‘레거시 밴드’를 볼 때의 느낌과 흡사하다. 세계가 노화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도 늙었지만 변하지 않고 변할 수도 없다고 믿는 한두 가지 잘 먹혔던 요소 안에 스스로를 가둘 때 바깥의 눈에 들어오는 일종의 처량함이나 서글픔이다.

음식에선 더 이상 매력이 배어 나오지 않는데 얼굴의 주름살은 점점 깊어진다. 고든 램지도 그렇지만 나는 제이미 올리버를 볼 때 가장 슬프다. 그것은 아마도 그와 내가 동년배이기 때문일 것이다. 거의 20년 전 쯤 마장동의 자취방에서, 황학동 벼룩시장에서 사온 배불뚝이 TV로 ‘네이키드 셰프’를 보면서 나는 한없이 즐거웠었다. 아이다스 트랙 재킷을 입고 밤에 놀러나갔다가 늦게 들어와서는 친구들과 나눠 먹는 소시지와 계란.

너무나도 좋아 보이지만 내가 원하지 않아도 지나간다. 수많은 밤을 밖에서 보냈고 수많은 소시지와 계란이 나의 팬에서 익었다. 때로는 혼자 먹기도 했고, 누군가와 같이 먹었던 적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순간이 찾아오고야 만다. 소시지와 계란은 그냥 소시지와 계란일 뿐이다. 음식은 물론, 함께 먹는 사람조차도 기쁨이나 행복 같은 긍정적인 감정을 안겨주지 못한다. 변화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알려주는 징조다. 소시지와 계란을 파묻어 버리거나, 팬을 재활용 쓰레기로 배출시키고 무엇이든 다른 것을 찾아야 할 때다.

나는 어쩌면 그렇게 할 수 있지만 그에게는 불가능할 수도 있다. 얼핏 달라보이는 많은 시도가 도마와 식탁 위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사실은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그런데 주름만 깊어지다니. 여전히 입에 침이 가득 고인 말투로 파스타를 반죽하고 허브잎을 뜯는 모습에 원하는 수준 이상으로 감정을 이입하고 있다면 이제는 그만 봐야 한다. 소시지와 계란을 내다버리고 나는 그렇게 떠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내가 보지 않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입에 침이 가득 고인 말투로 텃밭의 채소와 손이 빚어내는 맛과 함께 먹는 즐거움을 찬미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보다 더 서글픈 일은 없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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