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 불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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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괜찮아요. 천천히 일어나셔도 됩니다. 다 꿈이었다니까요. 현실은 멀쩡합니다. 가끔 낮에 잠들었다 깨면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벌어지지 않는 일이다. 전혀 괜찮지 않고 얼른 일어나야 하며 이것은 꿈이 아니고 현실이며 멀쩡하지 않다.

어제도 그러했다. 나는 다시 일상에 복귀해야만 했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 못했다고 말하는 게 정확하다. 운동을 가야 했지만 연락도 못하고 가지도 못했다. 일어나는 시점까지 밥을 한 끼도 먹지 않았다. 책상은 기껏 치워 놓았지만 아예 앉아 보지도 못했다. 일 때문에 연락을 몇 군데 돌려야 했으나 하지 않았다. 심지어 잠에서 깨어나기 전까지 월요일이라 착각하고 있었다.

생각나는 음식이 있어서 저녁을 먹겠다고 어딘가를 꾸역꾸역 걸어 내려가는데 혹 새벽이 아닌가 착각했다. 그렇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나는 그곳에 정확하게 가본 적이 없었다. 그저 지나가다가 보았을 뿐이었다. 한 끼도 먹지 않은 채 밤에 일어나, 새벽일지도 모른다고 착각하며 몇 킬로미터를 걷기란 행복함과 거리가 멀다. 다행스럽게도 음식점은 내가 예상한 자리에 예상한 대로 영업중이었다.

이런 종류의 ‘불백’은 20년 전에 많이 먹으러 다녔다. 성북동 기사식당촌에 연탄불로 구워 파는 곳이 유명하지 않던가. 신문 기사를 주워 듣고 그곳과 돈까스집을 종종 갔다. 학교 생활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안 간지 10년도 넘어서 아직도 존재하는지 모른다. 사실은 요즘 이런 형태로 끼니를 채우는 경우가 집은 물론 밖에서도 거의 없다. 하지만 아주 가끔, 본능적으로 생각이 난다. 그럴 때 아무 생각 없이 찾아 가곤 했던 다른 곳들과 차이라면, 이곳은 최소한 양념 폭탄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요즘의 끼니라는 건 대체로 연료의 개념에 근접한다. 다음의 끼니까지 일을 할 수 있는 수준의 에너지를 지속시켜 주면 그만이다. 그러나 대체로 이런 형식이 생각날 때 찾아가는 곳들은 오히려 반대로 의욕을 깎아 내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먹고 나면 정신이 몽롱해지다 못해 넋을 놓아 버리거나 잠에 빠지기도 한다. 이곳은 그런 수준은 아니었다. 6,500원짜리 치고 놀랍도록 먹을만 했는데 그건 아마도 두 가지를 포기했기 때문이라 보았다. 국산 돼지고기의 사용과 김치의 개입이다.

빨간 무 생채는 맛이라고 할 게 없었는데, 김치와 가장 닮았기 때문에 손이 가지만 일부러 맛없게 만들어 포기하도록 의도적으로 못 만들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머지 반찬도 교묘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올린 것이라 생각이 들지 않았다. 수준은 전혀 높지 않고 높을 수도 없지만 그 맥락 안에서 분명히 전체의 맛에 의식적인 영향을 미치도록 채택했다.

한편 고기-밥-국의 삼위일체는 반찬보다도 훨씬 훌륭했는데, 특히 고기는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고 비법을 얻었는지 기름기 없는 부위를 퍽퍽하지 않게 구웠다. 음, 놀라운데. 김치를 포기하고 단일 메뉴로 가면 최소한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낼 수는 있는 건가. 밥은 쑤셔 넣었지만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해 새벽인지 밤인지 분간을 못하며 나는 생각했다.

오는 길에 마트에서 100% 맛이 없을 거라 예상하고 귤을 샀는데 예상과 달리 150% 맛이 없었다. 그냥 맛이 없는 것도 아니고, 요즘 많은 음식과 식재료가 그렇듯 지향해서는 안될 지점이나 구간을 어설프게 좇다가 실패해서 맛이 없는 상태였다. 어떤 것을 기대해도 그 이하를 보여주는 곳이 많으므로 귤 5,000원 어치가 맛이 없다고 딱히 슬퍼하지 않는다. 그러나 올해의 귤은 유난히 맛이 지독하다.

생각보다 멀쩡한 연료를 쑤셔 넣었지만 나는 책상에 앉아보지도 못하고 또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

4 Comments

  • RainyDays says:

    트윗이나 블로그를 보다 보면 진짜로 건강(육체적인 것도 있지만 요즘은 멘탈)이 좀 걱정되네요. 좋은 글 더 많이 써주시고 좋은 책도 더 더 더 많이 내주셔야 하니까 건강하셔야만 합니다.

    그나저나 김치 없는 삶을 산지 오래 되었는데 김치를 그리워한 적이 전혀 없어요. 케바케겠죠 뭐.

    • bluexmas says:

      그렇지 않아도 요즘 전문가의 힘을 빌어 멘탈 관리 중입니다. 염려 감사합니다. 저도 김치 안 담근지 꽤 됐습니다. 없어도 괜찮아요.

  • R says:

    엄…관심법을 발동해 보면 문래돼지불백인거 같은데 맞는지는 모르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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