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열흘 남짓

미안합니다. 기억이 잘 안 나요. 누구한테 미안해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미안해해야 할 것만 같다. 그러나 사실은 아무에게도 그럴 필요 없다. 그저 나 혼자 책상에서 지지고 볶았을 일들이 잘 기억나지 않을 뿐이니까.

한 열흘 정도 마감이라는 걸 했다. 원고 다섯 편을 쓰고 양이 많지 않은 단행본 번역 한 권을 끝냈다. 원래 금요일 저녁~토요일 새벽 사이에 끝날 거라 예상했는데 원고 다섯 편 가운데 하나를 수정하는 바람에 토요일 오후에 책상을 떠날 수 있었다. 그대로 소파에 누워 담요를 덮고 현타를 느끼며 닥치는 대로 유튜브 영상을 아무 생각 없이 들여다 보다가 잠들어 저녁 시간을 훨씬 넘겨 깼다. 그리고 어찌어찌 오늘까지 지나왔는데 정확하게 무엇을 지나왔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지하철에서 열심히 쓴 원고가 큰 몫을 했지만 그래도 막판엔 모든 것이 조금씩 밀리면서 힘들었다.

청소와 설거지를 하고 책상을 정리하고 미트볼을 만들고 팟캐스트를 녹음하고 잡담을 쓰자, 라고 마음은 먹었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 대신 소파에 누운 채로 썩 맛있지는 않은 바클라바를 먹으며 음악을 들었다. 잊고 있던 노래로 시작해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들었다. 그리고 그 노래를 즐겨 듣던, 좋을 수 밖에 없었다고 여전히 믿고 있는 시기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렇게 때로, 정말 기억나지 않는 것들이 요즘 너무나도 많아지는 가운데, 기억에 의존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도 정말 기억이라고 하기는 이제 어렵다. 상이나 움직임 같은 것이 아니다. 뿌연 가운데 점이나 선 같은 것들이 흩어져 있는 수준이다. 그나마도 음악 같은 매개체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수준이라도 때로는 필요하고 또 도움이 될 때가 있다.

좋을 수 밖에 없었다고 여전히 믿고 있는 시기를 소환해 더듬더듬 밟으며 당장을 모면한다. 얼마만큼 가능한 일인지는 모른다. 그런 시기가 얼마나 길었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또한 모면해야 할 당장이 얼마나 남았는지 헤아릴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냥 일단 지나갈 수 있는 만큼 지나간다. 때로 전혀 존재를 모르고 살아온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면 그것에 의존해 하루를 넘기고 속으로만 고마워한다. 티나게 고마워하기엔 부끄러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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