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순서(또는 배수진) 잡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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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주에 한 번씩 다가오는 번역 원고 납품 여섯 번째 차례였다. 그러니까 나는 지난 12주 동안 2주에 한 번씩 100~200쪽의 번역 원고를 편집자에게 보내왔다는 말이다. 진도는 항상 여유 있게 뽑아 왔고 또한 이번 분량이 조금 복잡하고 어려웠지만 미리 계획을 세워 확인 작업을 거쳤으므로, 나는 어제 일의 순서를 굉장히 훌륭하게 정해 놓았다.

-일단 일어나 일을 시작하기 전에 오늘치 구몬(4쪽)을 한다: 요즘 마음의 여유가 없어 주 30장에서 20장으로 줄였다. 주말엔 웬만하면 안하므로 4쪽x5일=20장의 진도를 나가고 있다. 원래 구몬의 순서는 야근을 하지 않는다면 일과의 마지막으로, 야근을 한다면 시작으로 삼는다.

-다음 번 마감의 번역 진도를 뽑는다: 일일 할당량의 2/3분량, 즉 10장 정도만 1시간~1시간 30분에 걸쳐 가볍게 한다.

-오늘 보낼 분량의 최종 점검을 한다

-구몬 단원 마감 시험-이런 게 있는지 처음 알았다-을 푼다

-우체통에 집어 넣고 차의 눈을 턴다: 좀 쌓였더라.

-블로그 포스팅을 한다

-병원에 들렀다 오는 것으로 하루 일과 끝

그러니까 이것은 무엇보다 급하지 않은 일을 앞에 배치하는 일종의 과업 배수진이다. 안 그런 경우도 있지만 대개 크든작든 마감을 하고 나면 멘탈이 퍼지므로, 당장 급하지 않은 일은 하지 않고 싶어진다. 그래도 되는 때가 있고 안 되는 때가 있는데, 사실 지금은 굳이 전자는 아니지만 규칙을 지킨다는 의미에서 그냥 꾸준히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난 어제도 잠을 일찍 이루는데 실패했고 그 결과 당연히 늦게 일어났다. 이러면 모든 계획이 다 꼬여 버린다. 무엇보다 오늘 보내야 할 원고의 최종 점검 소요 시간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1시간? 2시간? 일의 리듬이라는 것이 있고 병원을 어중간한 시간에 가야 하며 또한 해가 빨리 진다. 모든 상황을 고려하면 어제 멋지게 세워 두었던 계획을 백지화하고 가장 급한 일부터 끝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최종 점검 및 원고 납품은 약 한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블로그 포스팅까지 하고 나니 역시 멘탈이 퍼지는 느낌이었고, 게다가 병원에 가야할 시각이었다. 결국 번역 진도는 뽑지 못해 직업적 자괴감을 느꼈지만 지금까지 여섯 번의 격주 마감을 큰 문제 없이 진도 맞춰 넘겼고 이제 한 번이 남았으므로 나는 뿌듯해서 현금 소비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병원에 들렀다가 코스트코에 들러 대용량 휴지를 샀다.

크나큰 실수라면 짧아 보이는 줄을 골랐는데 알고 보니 한 장의 카드로 복수의 계산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마감 때문인가, 속으로 땀이 흘러 정신이 혼미해졌다. 아니더라도 코스트코는 원래 정신이 혼미해지는 곳이지만… 어쨌든 휴지를 계산하자마자 포장의 손잡이가 떨어져버려서, 울면서 30개들이 화장지를 자식처럼 품에 안고 왔다. 그러나 나는 자식이 없고, 있더라도 30개들이 화장지만한 부피라면 안고 올만한 무게는 아닐 것이다. 그래도 자식이면 안고 와야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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