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화구이의 가난함

photo 1 (4)트위터에서 한식의 가난함에 대해 이야기했더니 분노한 이들이 있는 모양. 한식이 성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먹거나 감정적으로 애착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음식이라면 더 나아지는 걸 원하기 때문에라도 비판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그래서 이해를 못한다. 그런 이들이 적극적으로 한식의 가치-그게 무엇이든-를 이해하고 또 실천 및 계승하려 하는지도 알 수 없다. 한마디로, 내가 비판하려는 시각과 지점을 이해 못해서 감정이입하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거라면 별 의미 없다. 게다가 어떤 식문화권이라도 뒤져보면 가난함의 자취는 남아 있을 것이다. 가난함이 한식만의 문제라고 특정한 적 없다. 따라서 모두가 치를 떠는 ‘ㅁ단어’, 즉 ‘미개’를 들먹인 적도 없다.

진짜 가난했던 시절의 산물인 음식은 차라리 문제가 아닐 수 있다. 막말로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의, 정말 생존을 위해 먹어야만 했던 음식이나 그 흔적이라면 사실 상관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애초에 음식의 의미 가운데 가장 편향된 일부분만을 충족시켜 주기 위한 것이었다. 만들고 먹는 사람도 알았다. 문제는 그 이외의 의미, 즉 즐거움 등을 추구하기 위해 먹는 음식이다. 여전히 정신 및 개념적인 가난함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대표적인 예가 직화구이다. 현재 한식에서 외식을 위한 최고가 형식이지만, 요리하는 존재의 시각이나 철학이 전혀 깃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직화구이는 부위 별로 차등을 두어 최선의 조리 방식을 찾은 결과인가? 아니다. 거의 어떤 부위든 상관 없이 불판에 올린다. 요리 방식에 재료를 끼워 맞춘다. 위 사진의 고기는 양갈비다. 저렇게 익히면 속까지 익어 질겨진다. 하지만 한국으로 넘어오면 형식의 멍에를 피할 수 없다. 식탁의 직화구이는 효율적인 조리법이 아니다. 요리에서 가장 중요한 불을 두 가치 측면에서 모두 노출시킨다. 일단 공간적으로 노출시키고, 다음은 아마추어에게 노출시킨다. 설사 걸맞는 부위를 골랐다고 해도 잘 익히기가 어렵다. 그래서 고기를 잘게 조각낸다. 요즘 유행하는, 스테이크의 문법을 일부 차용하는 곳들처럼 덩어리로 익히든, 애초에 조각을 내어 올리든 마찬가지다. 고기는 마이야르 반응을 정확하게 얻지는 못하지만 과조리에는 딱 좋은 열원에 시달리며 내부의 수분을 빼았긴다. 휴식을 거치지 않고 도중에 가위로 자르면 칼에 비해 근섬유가 더 많이 눌리게 되니 조직의 파괴로 인한 수분의 손실이 더 클 것이다.

불을 잘 못 쓴다고 해서 맛을 들일 수 있는 요리의 대안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도 아니다. 숙성을 시도하는 곳들이 늘고는 있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것 만큼의 효과가 있는지는 모른다. 게다가 그도 소수고, 나머지는 ‘생’고기다. ‘날것=신선한 것’이라 믿는다. 진공 포장 보관으로 인한 습식 숙성의 혜택을 미약하게 입는 정도다. 양념하는 경우를 뺀다면 아예 소금조차 거치지 않은 채로 불판에 오른다. 더군다나 양념은 급이 낮은 고기를 가리기 위해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남아 있다. 그 의견에 동의하지도 않지만, (한식)양념 또한 오래 재워 둔다고 깊이 스며들거나 숙성을 유발해 맛을 한층 더 좋게 만들지 않는다.

격은 어떤가. 직화구이가 한식 최고가의 외식 형태라면 이에 맞는 격을 갖추고 있느냐는 말이다. 없다. 모든 가치를 재료에 쏟아 부으니 자명한 결과다. 나머지는 또한 정확하게 요리의 주체라고 여기지도 않는 ‘찬모’가 만드는 반찬으로 간다(독립적으로 다뤄야 할 주제지만, ‘찬모’라는 용어의 선택 및 사용이 내포하고 있는 인식의 문제가 대체 몇 가지인가?). 그탓인지 재료나 완성도가 높을 수는 있지만, 반찬이 개별 혹은 집합적으로 뚜렷한 맛의 얼개를 보여주지도 않는다. 맛보다 존재 자체를 확보하는 것이 선결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반찬까지 다 제 몫을 챙기고 남은 가치가 공간이나 집기 등으로 흘러가니 분위기 같은 건 애초에 갖출 여력이 없다.

밥이나 술도 있다. 전자는 이미 누차 지적해왔다. 비싼 곳에서도 미리 지어 풀기 없는 것을 내놓는다고. 식탁에서 직접 조리(요리라고 규정할 수 없다)를 하므로 직화구이 식사는 아무리 짧아도 30분 이상 걸린다. 쓸데없는 반찬 한두 가지 없애 공간을 확보하고 소량의 밥을 식탁에서 직접 지을 여유가 있다. 고기와 즉석 조리에 그토록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면 밥도 식탁에서 갓 지은 걸 먹어야 격이 맞다. 다들 갓 지은 밥을 얼마나 좋아하는가. 하지만 그런 시도는 하지 않는다. 술? 고기-직화구이를 특정해서 어울리도록 개발한 종류가 존재하는가. 소주나 국산 맥주처럼 애초에 낮은 가격+범용으로 개발한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민속/전통주는 어떤가. 고기에 어울리는 술의 조건이 있다. 도수와 수분이 적절히 균형을 이뤄 ‘모금’ 단위로 마실 수 있을뿐더러 단맛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 기름기를 씻어줄 수 있다. 그런 술이 존재하는가?

저성장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한국은 가난하지 않다. 적어도 외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가난하다. 음식이 줄 수 있는 모든 거의 모든 즐거움이 포만감으로 쏠린다. 맛에 대한 불신도 강하다. 맛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주체나 조리 방식, 재료의 신선함에 대한 믿음이 없다. 그래서 가장 널리 통하는 고급 외식이 직화구이와 활어회다. 나는 이 가난함이 물질 또는 경제적인 여건에서 100% 오는 것이라 믿지 않는다. 현재의 상황에서 이것보다는 더 잘 즐길 수 있다. ‘가성비’외의 다른 가치를 좇을 수 있는 여건은 갖췄다고 생각한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음식을 선택하는 상황에서는 다른 가치를 선택할 때보다 여유가 없어 보인다. 때로 이것이 감정적인 측면에서 우러나오는 입맛의 보수성 때문인가 생각해보는데, 아니다. 변종 양식이 인기를 얻는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한식과 똑같은 기준을 적용한다. 반드시 보아야 믿는다. 맛을 이루는 모든 가치가 시각적으로 구현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과거의 가난과 그 산물인 음식 문화를 통해 새겨야 할 교훈이나 지혜가 있을까. 원칙적으로는 그럴 수 있다고 믿고 싶지만 따져보면 자꾸 아닌 쪽으로 기운다. 무엇보다 그러한 시도가 가난을 미화한다거나 그 반대 개념이 정확하게 정립되지도 않은 가운데 소박함/소소함 등의 가치로 변질되어 정당화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음식 문화에서 가난의 문제는 정확하게 맛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부산물이다. 그 위에 개념과 철학의 문제가 있다. 고기는 비싸고 맛있는 재료다. 이를 맛없게 먹는 원인은 얼핏 조리 방식 때문으로 보이지만, 이 글에서 살펴 보았듯 정신적인 차원의 문제다. 정신적인 가난함이 형식의 구현을 한편 강제한다. 이런 가난함이 더 무섭다.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던 시절엔 모두가 자신의 가난함을 최소한 알기라도 했다. 지금은 모른다. 알아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8 Comments

  • 비내리 says: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구구절절이 좋은 말씀입니다. 옳은지는 차치하고.
    저는 마음이 가난하다기 보다는 문화가 가난해서라고 생각합니다.
    경제는 나아졌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생존을 넘어
    즐거움을 찾는 음식문화 외식문화의 경험은 일천한 것이라
    더 나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죠. 아직 가난한 문화에 젖어 있는 것입니다.
    님같은 분들이 이렇게 제대로 된 이론과 논리를 가지고 자꾸 지적을 하고 비판을 하면,
    조금씩 듣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그래서 음식문화도 성숙해지고 깊어지리라 생각합니다.
    고기구이에 대해 많이 배웠습니다. 고맙습니다.

  • 왕십리언 says:

    꽤 긴시간 글을 만드셨을텐데 이런 짧은 답급로 감사 말씀 드립니다.
    잘읽었습니다.이 맛에 요즘 자주오네요.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 Cell says:

    저도 가끔 친구들에게 하던 말이라 ‘앗’ 싶었습니다.

    스페인이나 이태리는 모르겠고, 적어도 프랑스 음식 문화는 ‘쾌락의 영역’에 속해 있지만,
    여기나 -어쩌다 영국에 나와 있습니다- 한국이나 음식 조리법 내지는 식문화 자체가 아직도
    ‘배고픔의 영역’에 속해 있다는 말을 했더니 여기 사람들은 그런갑다 하고 한국 친구들은 떫떠름해 하더군요.
    아시겠지만 영국은 2차대전 여파로 50년대 후반까지 배급제를 실시했던 나라였지요.

    음식에서 쾌락을 찾는 것을 죄악시하는 문화, 맛을 즐기는 것보다는 감사히 먹는 것에 중심을 두는 문화..
    30대만 되더라도 부모님 세대가 통일벼를 알고 강제 혼분식을 겪은 분들이니 쉬이 바뀌기 어렵겠지요.

    대다수의 사람들이 보고도 모를 것임에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아야 믿는’ 것도 사실입니다.
    못 먹을 음식들이 뉴스에 오르내리던 시절이 그리 오래 전이 아니니까요.
    그래도 그 시절보다는 분명 좋아지지 않았습니까? 이 또한 좋아지겠지요. 세월은 걸리겠습니다만..

    좋은 글 감사히 읽고 갑니다.

    • bluetit says:

      글쎄요. 한국은 잘 모르겠고, 영국의 경우는 동의하기가 좀 힘드네요.
      영국은 디저트와 티타임용 음식이 정말 어마어마하게 발달해 있지 않습니까? (저도 영국에 살고 있어요.)
      안 먹고 살아도 그만인 그야말로 ‘플레저’를 위한 음식이 예로부터 이토록 발달한 나라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즐기기 위한 음식이 많은 나라인데, 영국의 식문화 자체가 배고픔의 영역에 속해 있고
      음식에서 쾌락을 찾는 것을 죄악시하는 문화가 있다는 말씀은 수긍하기가 좀 어렵군요.
      어려운 시절 한때 그랬을 수는 있죠.
      긴긴 영국 식문화 역사를 볼 때 산업혁명 시기나 전후 배급제 같은 특수한 상황을 빼고는
      영국 식문화가 배고픔의 영역에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고기를 제대로 잘 구워(roast) 먹을 줄 안다고 예로부터 주변국의 부러움을 사기도 한 나라이고요.
      우리는 영국인들이 아침 식사를 양 많은 ‘풀 브렉퍼스트’만 먹고 사는 줄 알지만
      사실 영국은 유럽 안에서도 전통 아침 식사 종류가 가장 다채로운 나라 중 하나이기도 하죠.
      영국의 다양한 계층 사람들의 식문화를 엿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 Kamill says:

    그동안 한식에 대해서 깊이 있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늘 먹어왔고 해왔던 방식이기에 별 다른 고민의 대상이 아니었을까요.

    직화구이를 즐겨먹는 편입니다.
    생각해보면 음식 재료 저마다의 특성이 다른 것이 분명한데,
    그냥 모든 재료를 아무런 기준 없이 같은 불에 구워먹고만 있었네요.

    오늘 이 포스팅을 읽고 정말 많은 부분에서 공감을 하고 갑니다.
    정말 잘 읽고 갑니다.

    ps. 우연히 들어와 글을 몇 개 읽어봤는데 하나같이 읽는 맛이 있네요.
    즐겨찾기 해놓고 다른 글들도 하나하나 읽어보려합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