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지와 Parametric Recipe, 정보의 부족

IMG_8097대체 얼마만인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잊고 있다가, 올 여름에 오이지를 꽤 열심히 먹었다. 한국식 밥반찬으로 안 먹더라도 꽤 쓸 데가 많다. 짠맛이 오이 특유의 씁쓸함을 잘 통제하도록 담근 것이라면, 그 특성을 활용해 맛의 액센트를 주는 역할로 활용할 수 있다. 모든 조각에 껍질이 붙어 있도록 곱게 다지면 질감의 액센트 또한 동시에 줄 수 있다. 여름 음식을 예로 들자면 콩국수에 소량 얹거나, 기름에 섞어 샐러드-나물 무침의 드레싱에도 썼다. 사우전드 아일랜드 드레싱의 응용이랄까. 취나물과도 꽤 좋은 짝을 이룬다.

이마트에서 파는 걸 멀쩡히 잘 먹다가 직업적 호기심이 일어 백화점을 시도해보았는데, 결과는 별로 좋지 않았다. 일단 쓴맛이 너무 강해 먹을 수 없어 냉장고에 두었더니 하얗게 소금이 표면에 맺힌 것. 쓴맛은 오이+소금(천일염?)이, 겉에 맺히는 소금은 백화점 특유의, 노출시키는 판매 방식의 문제라 생각했다. 그런 제품이 덜 공업적으로, 또한 더 고급스럽게 보일 수는 있겠지만 오히려 진공포장한 채로 마트에서 파는 것들이 품질은 훨씬 나았다. 하여간 그렇게 몇 군데 제품을 먹어 보고, 직업적 호기심에 직접 만들어 볼 생각을 했다. 일단 소량만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에 SSG에서 세일하는 미니 오이를 집어 왔다.

재료의 가짓수가 적은 음식일 수록 사실 만들기 어렵다. 오이지의 경우처럼 발효와 같은, 초심자가 진행과정을 직관적으로 판단 내리기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 따라서 좋은 레시피가 필요하다. 두 가지 요건을 갖춰야 한다. 첫째, 재료의 양과 그 인과 관계를 정확하게 밝혀야 한다. 오이지의 경우라면 재료는 덜렁 오이와 물, 소금의 세 가지. 이 가운데 물과 소금의 무게 비율이 가장 중요하다. 오이가 잠길 정도로 준비한다고 가정할 때, 염도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지기 때문. 그리고 둘째, 발효라는 변화 과정의 자세한 설명이다. 일단 계절을 바탕으로 한 온습도 환경의 가이드라인을 규정한 다음, 그에 맞춰 걸리는 기간과 상응하는 변화를 밝혀줘야 한다. 이를테면 소금물이 허옇게 더께가 앉거나 오이의 질감이 변하는 정도를 최대한 자세한 언어로 설명하는 것이다.

찾아보니 이런 레시피가… 잘 나오지 않는다. 일단 가장 눈에 들어온 현상은 소금물에 담가 만드는 오이지 레시피가 별로 없다는 것. 설탕과 식초로 만드는 것 위주다. 물론 이것을 완전히 다른 음식으로 생각하면 딱히 고민할 필요가 없다. 심지어 서양식 피클도 끓는 촛물을 부어 만들어 바로 먹는 것(quick pickle)과 소금 위주로 젖산 발효 시키는 것(permented-kosher pickle)이 따로 있다. 하지만 문제는, 재료로는 전자인데 만드는 방식으로는 후자를 추구한다는 것. 설탕과 식초가 발효에 미칠 영향도 미심쩍지만, 이러한 레시피가 퍼지는 것이 결국 공감대를 형성한 미각-입맛의 반영이라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실제로 SSG 등을 돌며 시식한 오이지라는 것도 식초-매실 등으로 버무린 종류로, 짠맛은 전혀 없이 뭉툭한 단맛 위주의 음식이었다.

또한 소금 위주로 만드는 레시피 또한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위에서 말한 소금과 물의 양에 대한 관계 설정도, 발효로 인한 변화에 대한 설명도 없다. 재료가 간단한 저장 음식은 소수의 고정 변수만 정확하게 통제하면 양 조절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래서 ‘Parametric Recipe’인 것. 하지만 조리 과정 자체가 한없이 특수하다고 생각하는지, 변수를 고정한 다음 그에 따른 환경(날씨, 온습도)의 변화에 대응하는 요령을 알려주는 것이 레시피로서는 더 실용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정보는 찾지 못했다. 발효 음식 없는 문화권이 없는데, 서양에서는 이 과정 자체의 표준 및 매뉴얼화가 가능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자료화하는 반면, 한국에서는 ‘감’에 의존하는 비법적인 과정이라고 이해하고 시도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단 눈대중으로 만들었다. 계량을 하지 않고 만들었다는 말이 아니라, 계량은 하되 그 인과관계를 정확히 인지한 채로 만들지 못했다는 말이다. 가장 중요한 소금물을 몇 레시피를 참고해 10%로 만들었지만, 결과를 예상할 수는 없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1주일 뒤, 최소한 먹을 수는 있는 오이지를 얻었다. 참고한 레시피는 소금물을 다시 끓여 1주일 더 담가두라고 권했지만, 맛을 보니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아 냉장보관했다. 그리고 나서야 책을 좀 찾아보았다. 물론 한글로 된 책이 아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서양에도 발효 피클이 있으므로, 그 레시피와 배경 이론을 이해한 뒤 오이지에 적용하면 된다. 이 책인터넷의 정보 등을 통해 일단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가장 중요한 염지액의 비율: 한국 레시피에서는 최소 10%를 말하지만 너무 짜고, 질감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중론. 5%를 기준선으로 말한다.
  2. 발효의 조건: 최상 온도는 섭씨 18-21도, 기간은 2주 안팎. 혐기성 발효이므로 완전히 먹을 수 있는 상태에 이를 때까지 용기를 열지 않는 편이 낫다. 서양식으로는 아예 병에 담가 밀봉한 뒤 2-3주 뒤 개봉.
  3. 질감과 밑준비: 한국의 오이지는 대개 속의 씨가 완전히 없어지도록 숨을 완전히 죽인다. 과연 이게 최선일까? 아삭함이 좀 더 살아 있어도 되지 않을까? 레시피를 비교해보면 발효 피클의 경우, 소금물의 온도가 다르다. 한국식처럼 굳이 팔팔 끓는 걸 붓지 않는다. 즉석 피클에는 끓인 걸 쓰는 차이를 비교해보면, 금방 먹을 것이므로 높은 온도를 통해 펙틴을 분해시켜 맛을 빨리 들이려는 의도다. 반면 천천히 발효시켜 맛을 들일 것이라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고, 오히려 아삭함을 해칠 수 있다는 논리. 한국식 오이지(또는 참외 장아찌까지)는 다소 질기다고 할 수 있는 껍질과 절여진 속살의 대비로 인한 꼬들꼬들함을 높이 치는데, 그걸 감안하더라도 다른 선택지가 있는 게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다. 즉, 계속 전해내려오는 조리법과 달리 굳이 소금물을 끓는 채로 붓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말. 내가 만든 오이지의 껍질이 살짝 투명해진 것도 높은 소금물의 온도 때문인듯.

이 전체를 아우르는 결론을 한 단락 쓰다가 귀찮아서 지웠다. 요지는 그렇다. 습관과 전통은 다르다. 특히 음식에서 둘을 구분 못하면 발전은 없다.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믿어온 방법론이 사실은 맛도 없고 더 비효율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을 그냥 붙들고 있겠다면 누가 말리겠느냐만, 다시 보겠다는 시도에 귀한 전통 운운하면 난 대꾸할 가치를 못 느낀다. 너머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전통 운운하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말이다. 요리 연구가라는 직업과 종사자가 분명히 종사하는데 이런 음식에 대한 자료도 쉽게 찾을 수 없어서 외국 서적을 읽고 원리를 이해한 다음 뒤집어 적용 시키는 이 현실에는 분명 웃기는 구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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