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파이’와 참담한 싸구려 개드립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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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여의도 CGV에서 ‘스파이’를 보았다. 이런 류의 미국 코미디는 워낙 좋아하는지라 아주 재미있게 보았는데, 자막 번역이 그 재미를 굉장히 많이 깎아 먹었다. 그동안 썩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자막 번역을 많이 보았지만 이처럼 민감하게 반응한 적은 없었다. 대부분 영화의 특성 (장면 전환과 한 번에 담을 수 있는 글자 수 등)을 감안하면 참을만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제 <스파이>의 개드립 번역은 정말 참을 수 없었다. 의도적으로 영화 감상의 맥락을 왜곡하는 번역. 따라서 찾아보지 않고 대강 번역해 나온, 지식이나 정보가 틀린 오역보다도 훨씬 더 저질이었다.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건 정도가 지나친 의역.  ‘Upside down kidney bean face’ 같은 표현이 왜 굳이 ‘똥침 맞은 슈렉’이 되어야 할까? 더 웃기려고? 이 영화에서 등장인물이 주고 받는 대화는 극의 전개 및 각자의 성격을 드러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저렇게 쓸데 없는 개드립을 집어 넣으면  등장인물이 주고 받는 대화 전체를 끝까지 보지 못하고 어느 시점에서 그냥 웃어 버리고 만다.  그렇게 터뜨리고 마는 게 감독-각본의 의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역자는 그걸 침해한다. 같은 맥락에서 ‘lunch lady’를 ‘뚱땡이’로 옮긴 것도 심각한 침해. 비록 주인공이 과체중이고 간접적으로 영화의 우스개에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지만, 그걸 대사 등으로 직접 표현하지 않는 것 또한 의도라고 보았다. ‘lunch lady’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스파이의 조건에 주인공이 들어맞지 않음을 드러내려는 표현이라면, ‘아줌마’ 같은 표현만으로도 얼마든지 글자수의 제한을 받지 않으면서 옮겨 전달할 수 있다. 인터뷰에서 ‘극장에 자주 오지 않는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번역한다’며 ”000클럽’이라면 그냥 (지명/상호는) 쳐내고 ‘클럽’이라고만 옮긴다’라고 말하는 번역자는 왜 임의로 더 복잡한 의미를 불어넣고 있는 걸까. ‘Thundercunt’는 아예 언급도 하지 않겠다.

그나마 저런 건 ‘어차피 웃기려는 대사니까 웃기게 옮겼다’라고 변명하면 그럴싸하게나 들린다. 하지만 아예 맥락 자체를 바꿔 놓는 번역도 있었다. 영화 막판 제이슨 스태텀이 사건 현장에 침투하다가 문고리에 옷이 걸려 넘어지는 장면에서 주인공의 대사는 ‘He means well’이었는데, 정확한 ‘워딩’이 기억나지 않지만(이미 그 시점에서 자막에 거의 신경을 꺼버려서) 옮긴 대사는 원래의 의미와 아주 거리가 멀었다. 이 또한 기본적으로 타인을 배려하는 주인공의 성격을 보여주려는 의도를 침해하고 영화를 왜곡시킨다.

언급한 것처럼 영화 번역의 특성을 이해하지만, 그래도 번역은 번역이므로 지켜야할 선은 있다. 나는 의도가 어쨌든, 지나치게 개입하려는 역자를 최악으로 취급한다. 이해를 돕는 수준을 넘어 자기 멋대로 의미를 불어 넣는 경우다. 원작의 권위와 틀을 업고 자신의 색채를 과도하게 입히는 번역은 번역이 아니다. ‘스파이’는 분명히 그런 싸구려 개드립 없이도 충분히 웃기는 영화건만, 번역자가 지나치게 개입해 수준을 떨어뜨려 놓았다. 찾아보니 ‘첼리스트’를 ‘첼로리스트’라 옮긴 박지훈 번역가와 SNL의 작가들이 손을 댄 모양인데, 정확하게 개드립이 누구의 책임인지는 몰라도 이따위로 수준을 떨어뜨릴 필요까지는 없다는 걸 좀 알았으면 좋겠다.

5 Comments

  • Jung says:

    킹스맨을 보다가 가이아 이론을 주장하던 교슈 언급할 때 분명히 “imperial college” 교수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자막에 번역 안했었습니다. 부들부들

  • test says:

    저도 한번 트위터에서 “왜 수준 미달의 자막 제작자들이 계속 일을 맡는가”에 대해 성토한 적이 있습죠

  • Jay_KIM says:

    이미 많이 지난 일이지만, “Chef”에서 Sweet bread가 꿀빵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영화가 끝날때까지 머릿속에 꿀빵,꿀빵,꿀빵…
    번역자가 사과문을 올렸다지만, 영화 보는 내내 머릿속에 꿀빵이 이리저리…

    *이건, 궁금해서 여쭤보는건데요,
    알뜰함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요?
    접시의 소스까지 알뜰하게 먹던 친구에게 좋은 의미로 말하려다, Frugal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더니,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더라구요…^^;;;

  • guswns says:

    저런놈들은 나가 뒤져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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